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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교생 논문 작성은 의대 지망생에게 수술하라는 것과 같다’

등록 2022-06-16 05:00수정 2022-06-16 11:34

엘리트로 가는 그들만의 리그
③ 글로벌 엘리트, 욕망의 기원
'약탈 저널' 연구 권위자 제프리 빌 전 교수 인터뷰
“논문은 학문적 경험을 쌓은 뒤 쓰는 것”
논문 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투고료를 챙기는 일부 저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약탈적 저널’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제프리 빌 전 미국 콜로라도대학교(덴버) 교수. 제프리 빌 제공
논문 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투고료를 챙기는 일부 저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약탈적 저널’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제프리 빌 전 미국 콜로라도대학교(덴버) 교수. 제프리 빌 제공

‘논문, 출판, 봉사단체 설립, 앱 제작 기획, 미술 전시회….’ 한동훈 법무부 장관 딸의 ‘스펙’은 눈부시게 빛나지만 학벌을 세습하려는 한국 엘리트의 욕망과 글로벌 스펙 착취 산업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복마전의 민낯과 그 밑바닥에 꿈틀거리는 불안을 세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딸과 사촌들의 ‘스펙 의혹’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약탈적 저널’(predatory journal)이다. 표절 및 대필 의혹이 불거진 이들의 논문 상당수는 별다른 심사 없이 돈을 받고 논문을 게재해주는 약탈적 저널에 실렸다. 해당 저널들에 ‘약탈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연구와 출판 경험이 필요한 연구자들의 시간과 평판 등을 약탈한다는 의미에서다. 이처럼 최근 문제가 되는 고등학생의 논문 출판을 설명하는 데에는 제프리 빌 전 콜로라도대(덴버) 교수가 정의한 ‘기생적’이라는 용어가 적합하다. 그는 약탈적 저널과 공생적 관계를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을 ‘기생적 기여자’로 정의했다.

빌 전 교수는 2010년께부터 ‘빌스 리스트’라는 이름의 약탈적 저널 목록을 생산해왔다. 빌스 리스트로 인해 저널들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고, 일부 학술지의 경우 분류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빌 전 교수가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한겨레>는 지난 9일과 10일 한 장관 딸의 약탈적 저널 논문 등재 문제에 대해 빌 전 교수와 전자우편 인터뷰를 진행했다.

빌 전 교수는 고등학생이 저널에서 논문을 출판하는 것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그는 “고등학생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의과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의대 지망생에게 수술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약탈적 저널이건 적법한 저널이건 논문 출판은 학문적 경력을 쌓은 뒤에 해야 하는 일”이라며 “(고등학생뿐 아니라) 대학생도 일반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이나 출판을 배우지 않는다. 이것은 석사 학위나 박사 학위 단계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아주 드물게 학생이 정말 뛰어난 천재라면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고등학생이 저널에 논문을 출판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고등학생은 학습하는 사람이지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 장관의 딸은 2021년 2월부터 2022년 2월까지 4~10쪽 분량의 논문 7편을 작성했는데, 5편을 약탈적 저널로 의심되는 곳에서 출판했다. 특히 그중 1편은 케냐인 대필 작가가 작성한 정황과 증언이 나왔다. 약탈적 저널에 실은 논문 대부분은 한 장관 딸이 단독 저자였지만, 2021년 2월 출판한 논문은 ‘스펙 공동체’ 의혹을 받는 사촌 2명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사촌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논문을 여러차례 출판했으며, 모두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사촌들의 논문 다수가 표절 의혹을 받았고 결국 다수가 철회됐다. 한 장관의 딸 논문도 마찬가지다.

한 장관 딸 논문의 표절·대필 의혹을 두고서는 빌 전 교수는 “어떤 유형의 표절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만약 표절이나 대필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빌 전 교수는 “그 학생은 큰 야망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야망은 올바른 방향으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며 “(이번 사건은) 학생들이 학문적 출판 윤리에 대해 배울 기회이며, 아직 어리기 때문에 학생이 윤리를 배우고 미래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가 도울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빌 전 교수는 케냐 등 제3세계 국가의 지식인들이 영미권 대학생들의 과제나 논문 등 대필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했다. 그는 “‘계약 부정행위’라고 불리는 일이다. 미국을 포함해 모든 나라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고 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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