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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여기, 노후에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이 있다

등록 2021-11-30 10:51수정 2021-11-30 11:10

[제33차 세계협동조합대회]
협동조합 정체성 실천 세션

고령화 시대 ‘돌봄’ 민간시장에 의존
수익 위주·공공성 훼손 우려 커져
공동체 중심 ‘대인 돌봄’ 모델 확산

94년 첫 의료사협…안성 등 전국 확산
지역 건강공동체로 ‘돌봄 사회화’ 발판
‘재가 의료사업’으로 의료와 복지 통합

정부 지원·법 제도 마련 활성화 조건
사회적경제법·돌봄법 제정 우선 과제
나이 드는 일이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 병원과 요양원만이 유일한 대안일까?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살던 곳에서 이웃들과 함께 존엄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면, 늙는다는 건 그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고, 피부가 약간의 탄력을 잃은 정도의 일로 여겨질 수 있다. 나이 듦이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규정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는 3일 열리는 제33회 세계협동조합대회 3일 차 행사에서는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실천하는 사례들이 소개된다. 특히 코로나 이후 더욱 주목받게 된 보건과 사회서비스를 주제로 한 세션이 마련돼 고령화 문제와 돌봄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전주의료사협에서 교육받은 건강지킴이들이 한 노인의 집에 방문해 생일파티를 하고 있다. 전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전주의료사협에서 교육받은 건강지킴이들이 한 노인의 집에 방문해 생일파티를 하고 있다. 전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우리나라가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가족 안에서 돌봄을 책임지기 어려워지면서 돌봄에 대한 많은 요구가 시장으로 외주화되기 시작했다.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으로 일상생활을 독립적으로 할 수 없는 노인을 대상으로 생활 지원을 할 수 있도록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를 도입했지만, 수익 창출에 집중하는 민간의 공급구조에 상당 부분 의존하면서 돌봄의 공공성이 훼손됐다는 지적이 많다.

<한겨레>가 지난 2019년 봄에 보도한 ‘대한민국 요양보고서’ 기사에선 요양원을 “숨 멈춰야 해방되는 곳”으로 비유했다. 모든 곳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실한 식사, 용변조차 자유롭지 못한 일부 요양원에서 노인들은 ‘돌봄’ 대상자가 아니라 ‘처치’ 대상자였다. 여기에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 조건 속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들의 처우 역시 문제였다. 그야말로 무늬뿐인 돌봄, ‘돌봄 워싱’(care washing)이다. 겉으로만 노인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할 뿐, 돌봄의 가치를 훼손하는 곳이 많았다.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돌봄 문제를 연구하는 모임인 ‘더 케어 컬렉티브’(The Care Collective)가 지난해 발간한 책 <돌봄선언>에서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대인 돌봄 아웃소싱(외주화)으로 공동체 돌봄이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연구자들은 “모두가 책임을 지는 ‘보편적 돌봄’이 필요하고, 지자체와 협동조합 등 지역 내부 자원을 활용해 공공 부문을 재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돌봄 민주주의> 저자이자 돌봄 연구 권위자인 조안 트론로 미국 미네소타대 정치학 교수도 “돌봄의 가치는 사물과 상품의 교환가치로 대체될 수 없다. 대인 돌봄은 접촉과 정서적 애착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네덜란드의 지역사회 기반 돌봄 회사인 ‘뷔르트조르흐’는 대인 돌봄의 가치를 실현한다. 조직 이름도 ‘이웃 돌봄’이라는 뜻이다. 3~4명의 간호사가 팀을 이루어 마을 노인들의 집을 방문해 의료와 돌봄을 통합적으로 제공한다. 노인의 건강상태 파악은 물론 샤워나 산책 등 생활보조도 함께하면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2006년 설립 당시 4명으로 시작한 조직은 현재 네덜란드 전역에서 850개 팀, 1만명 이상의 간호사가 활동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지역 중심의 대인 돌봄 모델인 뷔르트조르흐 모델은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는 물론 일본, 인도, 대만 등 25개 국가로 확산했다.

1994년 4월 24일,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사협인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창립했다.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제공.
1994년 4월 24일,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사협인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창립했다.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지역 내 돌봄 가치 실현하는 의료사협

국내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료사협)을 중심으로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1987년 경기 안성군 내 무의촌 지역이었던 고삼면 가유리에 사는 청년들은 마을에 의료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연세대 기독학생회 학생들과 연합해 주민들을 진료했다. 이들의 활동은 1994년 4월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창립으로 이어졌다.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 의료사협이었다. 이후 1997년엔 인천에서 평화의료사회적협동조합이 만들어졌고, 뒤이어 안산(2000), 원주(2002), 민들레(2002)의료사협이 생겼다. 2003년엔 지역 의료사협들이 모인 한국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연대가 만들어졌고, 지금은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2021년 현재 21개 회원조합, 5만명 이상의 조합원, 1300여명의 직원이 함께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의료사협이 추구하는 가치는 명확하다. 이곳에 속한 조합원들은 의사, 간호사 등 의료인에만 의존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명 한명이 건강의 주체로서 이웃을 돌보는 역할을 하면서 협동 정신을 나눈다. 이들은 지역사회를 하나의 건강 마을공동체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크다.

이런 가치는 정부가 2018년부터 시행한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 케어) 정책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사람들이 그동안 살던 곳에서 보건, 돌봄 등의 사회서비스를 받아 독립적인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만드는 정책이다. 그간 병원이나 요양 시설에 의존해온 고령자, 장애인의 ‘탈시설’과 그들 가족의 돌봄 부담 해소를 위한 ‘돌봄의 사회화'를 지향한다.

대전 대덕구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팀 중심 의료 구조. 의사, 간호사 뿐만 아니라 지역 내 복지관과 건강증진센터 등과 함께 연계해 환자와 주민의 건강을 책임진다.
대전 대덕구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팀 중심 의료 구조. 의사, 간호사 뿐만 아니라 지역 내 복지관과 건강증진센터 등과 함께 연계해 환자와 주민의 건강을 책임진다.

지난 20여년간 의료사협은 여러 의료서비스 혁신 모델을 발굴해 환자의 탈시설과 돌봄의 사회화를 이루는 데 앞장서왔다. 안산의료사협의 재가 의료급여 사업은 의료사협이 의료와 복지를 통합해 제공하는 모델이다. 안산시청과 안산의료사협이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방문요양사, 영양지원사 등으로 팀을 꾸려 안산시 내 요양병원과 2~3차 병원에 30일 이상 입원 중인 사람들에게 의료, 주거, 식사, 돌봄, 이동 서비스를 지원한다. 가족이 돌봄을 책임질 수 없는 경우 병원 입원만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어 재입원을 하는 환자들이 많은데, 재가 의료급여 사업을 통해 환자가 집에서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재가 의료급여 사업의 성과는 뚜렷하다.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개최한 ‘의료급여 종합토론회’에서 이요셉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부연구위원은 재가 의료급여 시범사업을 통해 퇴원 환자 266명을 1년간 지역사회에 정착시킨 성과를 소개했다. 응답자 116명 중 87.9%가 서비스에 만족했으며, 79.3%가 재입원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진료비 지출 역시 급격히 감소했다. 퇴원 전 1인당 평균 진료비 약 309만원에서 퇴원 후 약 82만원으로 줄어 73%의 감소율을 보였다.

재가 의료 사업의 핵심은 팀 중심 방문 의료다. 대전 대덕구 민들레의료사협은 지역사회의료센터를 설치해 방문 의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한다. 이곳엔 방문 의료 전담 의사가 거동이 불편해 의료기관에 찾아가기 어려운 환자들의 집을 직접 방문한다.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작업치료사, 치과위생사도 방문해 건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 복지기관과 공공기관과도 협력해 건강상담이나 운동교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처방과 치료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예방과 정서적인 지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므로 온 마을이 함께 나서서 돌보자는 것이 팀 의료의 핵심이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케어비앤비 건물에 입주자가 들어가고 있다. 입구엔 조합원들의 ‘호혜적 돌봄’ 실천 활동 기록판인 ‘노동의 협동’이 게시돼 있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케어비앤비 건물에 입주자가 들어가고 있다. 입구엔 조합원들의 ‘호혜적 돌봄’ 실천 활동 기록판인 ‘노동의 협동’이 게시돼 있다.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과정에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곳도 있다. 서울 은평구 살림의료사협은 지난해 은평구청, 한국토지주택공사,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한국의료사협연합회와 협약을 맺어 ‘케어비앤비’(Care Bed & Breakfast)라 부르는 중간 집을 마련했다. 의료의존도가 높고 돌봄이 필요하지만, 집에도, 병원에도 있기 어려운 환자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 입주한 환자들은 재활치료와 훈련을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주민들이 직접 건강 돌보미로 나선 사례도 있다. 전주의료사협은 주민들이 직접 지역 환자들의 돌봄 공백의 시간을 채우는 건강 지킴이 사업을 2019년 전주시에 제안했다. 돌봄은 종일 필요하지만, 건강보험급여와 재가 장기요양급여를 통해 행정이 제공하는 돌봄의 시간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건강 지킴이는 환자 가정에 방문해 의료진으로부터 공유 받은 운동 처방법이나 약 복용 등을 확인하고, 혈압과 혈당 측정, 인지 프로그램 실시 등 사전에 의료사협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활용하기도 한다. 전미소 전주의료사협 실장은 “건강 지킴이가 환자들과 유대 관계를 맺으며 또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돌봄 공급자와 수혜자가 아니라 이웃끼리 서로 도우면서 서로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고 의미를 전했다. 전주에선 건강 지킴이 사업을 만 60세 이상 주민을 대상으로 한 일자리 사업으로 확대해 올해 140명의 고용을 창출하기도 했다.

전주의료사협에서 교육받은 건강지킴이가 한 노인의 집에 방문해 구강교육을 하고 있다. 전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전주의료사협에서 교육받은 건강지킴이가 한 노인의 집에 방문해 구강교육을 하고 있다. 전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제공

협동의 가치로 돌봄 미래 이끄는 협동조합

의료사협은 어떻게 이런 실험적 사업을 선도적으로 할 수 있었을까? 민앵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상임이사는 협동조합이 추구하는 가치에서 해답을 찾았다. 그는 “주민 스스로 필요 때문에 자발적으로 시작한 안성의료사협처럼 협동조합은 자발성, 자율과 독립, 협동 등의 가치를 추구하고, 이것이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어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문제는 의료와 돌봄이 분리된 것인데, 사람을 중심으로 보면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국내 의료사협들이 이 지점을 실현하고 있다”고 짚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 등 7개 부처가 합동으로 발표한 ‘사회적 경제를 통한 사회서비스 강화’ 보도자료에는 “민간 위주의 사회서비스 전달체계가 공공성을 확보하는데 미흡하다”고 진단하면서 “공공성, 맞춤형 서비스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 조직을 통해 사회서비스 공급을 활성화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지역사회에서 일상적 돌봄의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는 의료사협을 건강 의료서비스 대표 사업으로 꼽았다.

그러나 의료와 돌봄의 통합을 의료사협에만 온전히 의존해선 안 된다. 앞서 소개한 혁신사례들이 지역에 단단하게 뿌리 내리려면 민간의 공공 활동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협력이 필수적이다. 민앵 이사는 ‘법적 기반 마련’을 과제로 꼽았다. 민 이사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사회적경제기본법’ 제정이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의료사협 등 사회적 경제 조직과 일을 할 때 근거 조항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지역사회 통합돌봄법’ 제정도 필요하다. 현재 시범사업으로만 운영되는 통합돌봄 정책을 넘어서 사회 전체가 돌봄의 짐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제도적 근간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제33회 세계협동조합대회 3일 차 행사에서는 보건 및 사회서비스 사례 외에도 보람있는 일자리, 식량 안전, 주거와 에너지 파트너십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협동조합들의 생생한 실천 사례도 들어볼 수 있다.

서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원 hyeb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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