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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명랑함이 너의 죄다?

등록 2010-08-15 15:22수정 2010-08-15 15:33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17
[난이도 수준-중2~고1]

오늘은 글쓰기 홈스쿨 현장 중계. 이름하여 ‘초딩 은서 학대사건’. 가해자는 부친.

“맨 첫번째로 놀러간 곳은 친할머니 집이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맨 먼저 이를 닦고서 세수를 하고서 텔레비전을 재밌게 봤다.(중략) 2일 있다가 곧 외할머니 집에 갔다. 집에 들르기 전에 근처에 생강 도너츠를 사갔다. 역시나 외할머니도 우리를 반갑게 맞으셨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서 안동의 하회마을로 갔다.(하략)”

☞ 으이그 에세이를 쓴 거니, 일지(日誌)를 쓴 거니? 네가 무슨 일지매냐?(썰렁) 여행 첫날 이거 저거 했고, 다음날은 이렇게 저렇게 놀고, 그 다음날 어디 가서 무얼 먹고…. 뒤에 덧붙인 주관적 소감은 달랑 두 가지, “너~무 재미있었다”와 “재밌게 놀았다”. 다시 써!

“이번 휴가는(…) 컴퓨터와 텔레비전이다. 휴가는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는 친할머니와 가족과 함께 집 근처의 금대리에 있는 계곡에 갔다. 그곳에 가서 오빠와 함께 누가 맨 마지막에 먼저 가냐 시합을 했다.(하략)”

☞ 억지다. 조금 유치한 첫 문장을 빼고는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나 여행에서 경험한 모든 일을 하나씩 똑같은 비중으로 적었다. 몽땅 기록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그중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 체험을 집중적으로 묘사해봐. 그때의 네 마음까지 묘사해봐. 마지막 문장도 끔찍하다. “어쨌든 이번 휴가는 정말, 좋았다.” 뜬구름 잡는 ‘좋았다’ 말고 다른 거 없니? 한 번 더 써!!

(이후 두 번이나 글을 더 썼으나 그게 그거. 은서는 두통을 호소함.)


“파도치기를 탄 나의 오늘 기분은, 스릴 만점 짱이었다! ㄱ-ㄱ” “내 귀에도 물이 들어갔고, 내 코에도 물이 들어갔다. 수영장 물도 마셨다. 하지만 기분은 짱이었다.”

☞ 네 기분은 짱이지만, 아빠는 짱난다. 너는 ‘휴가지에서 생긴 일’을 주제로 도합 네 번이나 썼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체험만 지루하게 나열했고 느낌은 1차원을 맴돌았다. 네 감정을 디테일하게 설명할 줄 모른다. 아니,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듯하다. 여러 차례 결함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포기해야 하나? 네가 글을 못 써서가 아니다. 글쓰기 지도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써야 할지 답답한 만큼, 아빠도 너에게 글쓰기 기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캄캄 절벽과 만났다. 문득, 이건 노하우와 기교를 알려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곱셈, 나눗셈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에게 미적분 문제를 풀라고 시켰다는 자괴감이 솟았다.

열 살 은서는 명랑하다. 농담 삼아 ‘조증’(躁症) 어린이라 놀릴 정도다. 결핍을 느껴보지 못했다. 상처받은 적 없다. 우울함, 그리움 따위가 뭔지 잘 모른다. 사춘기도 겪지 않았다. 경험치의 한계는 형용사의 한계다. “재밌다” “즐거웠다” “좋았다” “짱이다”의 반대 표현을 써볼 일이 없었다. 희로애락을 세밀하게 담아두고 표현할 자신만의 정서 그릇이 없는 셈이다.

연재 17회째다. 선의로 시작했지만, 글쓰기 홈스쿨이 ‘글쓰기 아동학대’가 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조급한 다그침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머리를 친다. (악마의 속삭임 : 아니야. 은서는 이번 기회에 죽도록 고생 좀 해봐야 해. 학대받는 만큼 성숙해진다니깐.)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1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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