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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불법 문장’ 쓰고 딱지 끊을라

등록 2010-06-06 16:27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⑦
[난이도 수준-중2~고1]

비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17년 전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고향의 어느 산 중턱 장지에서였다. 땅에 관이 들어가는 절차가 끝난 뒤 비석을 세우는 작업이 이뤄졌다. 미리 확인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눈물이 쏟아지던 와중에도 직업적 본능을 발휘하며 비석에 새겨진 문구를 샅샅이 훑었다. ‘혹시 오자는 없나?’ 아니나 다를까. 네 글자로 잘못 기재된 아버지의 한자 이름이 눈을 후비듯 다가왔다. 엥? 이게 뭐야?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시간은 불과 1분여! 나의 ‘무식’이 웬수였다. 고인의 성과 이름 사이에 공(公)이 들어간 것을 착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문(碑文)에 비문(非文)이 들어간 줄 착각했던 그때를 떠올리면, 한편으론 슬프고 한편으론 썰렁하다.

준석과 은서에게 “비문이 뭐냐?”고 물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라는 답이 돌아온다. “다른 뜻은 또 없냐”고 재차 물었다. ‘비밀의 문’ 아니냐고 한다.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비문(非文)은 잘 모르나 보다. 오늘은 그 마지막 ‘비문’을 말하고자 한다.

한 달 전 퇴근을 하다가 어느 건물 꼭대기에 나부끼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미친넘에 장난질에 미쳐가는 지역주민.” 강제철거와 재개발 정책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혼자 눈을 찌푸렸다. 원색적이어서가 아니다. ‘아이 참, 이왕이면 맞춤법 좀 지키지.’ ‘미친넘’이 아니라 ‘미친놈’이 바르다고 우기지는 않겠다. ‘미친넘’은 그냥 놔두더라도(‘넘’이 주는 고유한 느낌을 존중해서다) 방향을 나타내는 ‘에’라는 조사는 잘못 들어갔다. “미친넘(의) 장난질에 미쳐가는 지역주민”이 미치지 않은 표기다. 절박한 생존권을 앞에 두고 한가한 소리 하냐는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욕을 퍼붓더라도, 우리 인간적으로 맞춤법은 지키자.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다. 비문이 담긴 비난과 주장은 두세배 더 격이 떨어진다.

‘비문’은 주변에 널렸다. 아파트 경비실 안내문에서, 식당 메뉴판에서, 시민단체 성명서에서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잘못된 문장들과 자주 만난다. 우리 집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태어날 때 내 얼굴 및의 왼쪽에 작은 점이 있었다. 4, 5살 때는 얼굴이 커지면서 왼쪽 및 점이 같이 커졌다.”(은서) 앞의 플래카드처럼 조사를 잘못 사용하거나 은서처럼 표기가 어긋난 경우는 교통 법률에 비유하자면, 기초질서 위반사항이다. 다음의 경우는 더 고차원의 엉터리다. “은서의 비밀이 있다면 이를 매우 매우 잘 닦지 않는다는 점, 밥을 더럽게 먹는다는 점이 있다.”(준석) “나는 많이 먹는데도 별로 살이 찌지 않는다. 그 이유에는 2가지 이유가 있다.”(은서) 주어와 술어가 따로 놀거나 역주행하는 것은 문장의 교통질서를 어지럽히고, 더 나아가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히는 ‘불법 행위’다. 엄하게 처벌받을 수 있다.

실제로 그렇다. 신문사 경력기자 채용 때 지원자들의 자기소개서를 심사한 경험이 몇 번 있다. ‘불법 문장’들은 눈에 거슬린다. 아무리 내용이 그럴듯해도 표기가 틀리고 문장이 꼬이면서 주술관계가 엉망이면 신뢰에 금이 간다. 결국 짧은 서류심사만으로 극형에 처해지기 일쑤다. “리스트 아웃!”(List out)

자라나는 아이들은 미리미리 문장 신호등을 잘 지키는 버릇을 익히기 바란다. 어른이 되어 맞춤법 경찰 아저씨들한테 딱지 끊는 일 없도록. 실전 팁은 담 기회에.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 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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