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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언제 이렇게 컸지?’ 아이들 재발견

등록 2010-05-02 15:22수정 2010-05-09 15:50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
[난이도 수준-중2~고1]

개과천선은 포기했다.

나는 나쁜 아빠다(칼럼 문패를 ‘나쁜 아빠의 글쓰기 홈스쿨’로 제안했을 정도다). 나쁜 아빠는 좋은 아빠의 반대말이다. 일반적 기준으로 볼 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낸다면 좋은 아빠일 공산이 크다. 나는 얼굴을 볼 틈이 없었다. 일에 몰두하거나 노는 걸 즐기는 ‘그룹 2AM’(새벽 2시에 귀가하는 이들)의 일원이었다. 계속 이렇게 살 것인가. 음, 아무래도 계속 이렇게 살 것만 같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개과천선은 포기했다.

다만 최소한의 죄의식은 피할 길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아들은 중학교에 들어갔고, 딸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코앞이다. 눈 깜짝할 사이 몇 년이 흐르면 훌쩍 커버린다. 지금은 내가 꼬마들과 놀아주지 않지만, 조금만 있으면 꼬마들이 나와 놀아주지 않는다. 관계는 더욱 삭막해질 테다. 무관심했던 아빠를 두터운 침묵으로 응징할지도 모른다. 늦기 전에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던 와중에 불현듯 머리를 스친 아이템이 ‘글쓰기’였다. 그래, 함께 글을 써보자.

이 프로젝트를 결심하자마자 ‘채찍’을 휘둘렀다. 나에겐 말고, 꼬마들에게만 휘둘렀다. 마감일을 정해두고 과제를 줄기차게 내준 뒤 ‘빚 독촉’에 나선 것이다. “10년 넘었으니 인생 꽤 살았네. ‘나의 인생’이란 주제로 총정리해봐.” “세뱃돈 받았지? 그 얘기 괜찮겠다.” 미리 ‘연재 식량’을 다량으로 쌓아놓는 ‘원시적 축적’이 필요했다. 그래야 나에게도 쓸 거리가 생길 테니까.

아빠는 계속 과제를 내주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쓰기와 연결시켰다. “새똥을 맞았다고? 더러운 기분을 적어봐.” “아깝다. 반장선거에 출마했다 떨어졌다니. 심경 고백을 하는 거야.” 아이들은 신이 나 일사천리로 글을 휘갈겼지만, 싫증을 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졸린다며, 컴퓨터 게임을 한다며, 학교 숙제를 못했다며, 시험 준비가 더 급하다며….

그럼에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아들 준석이 처음 쓴 글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속엔 내가 몰랐던 준석이 있었다. 아빠는 녀석이 어중이떠중이 중딩일 거라고만 여겼지만, 어느새 관찰력과 어휘력은 성큼 자라 있었다. ‘아니, 얘가 내 아들이었나? 언제 이렇게 컸지?’ 그만큼 내가 무심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더 결정적인 발견은 아이의 수다였다. 아빠 앞에선 말없고 무뚝뚝하기만 하던 준석이, 글 속에선 천연덕스럽고 유머러스하게 갖가지 이야기를 풀어냈다. 동생 은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적인 대화엔 등장하지 않던 기발한 언어가 글 속에 꿈틀거렸다. 맞춤법이나 논리 전개의 완성도 따위는 나중의 문제였다.


초·중딩을 자녀로 둔, 나와 비슷한 처지의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글쓰기는 부모 자식간의 대화를 즐겁게 증폭시켜주는 새로운 놀이방법이다. 시큰둥하게 굴면 한 편 쓸 때마다 용돈이라도 쥐여주며 꼬드겨보라. 시시껄렁한 생활 속의 소재라도 멋대로 쓰라고 해보는 거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아이들의 속내가 묻은 수다를 접하게 된다.

한 가지 유의하자면, 되도록 사춘기 전에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 이유는 첫째, 부모와의 대면 접촉을 극도로 기피할 때가 되면 글을 주문해도 ‘씹힐’ 가능성이 높아서다. 둘째, 나이를 먹을수록 초현실적인(!) 엉뚱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용이 반듯해지고 재미없어진다는 얘기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뭐야 이거, 나 나쁜 아빠 맞아? 개과천선 포기한다고 했다가, 전향서를 써버렸다.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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