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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조선시대 평민들은 왜 말을 피해 다녔을까

등록 2006-07-02 19:46수정 2006-07-03 14:47

조선시대 종로 뒷쪽에 형성된 ‘서민의 길’ 피마골은 오늘날에도 서민들이 즐겨 찾는 선술집과 음식점들로 붐빈다. 인근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본 피맛골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조선시대 종로 뒷쪽에 형성된 ‘서민의 길’ 피마골은 오늘날에도 서민들이 즐겨 찾는 선술집과 음식점들로 붐빈다. 인근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본 피맛골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테마별로 떠나는 테험학습 / 피마골·종로 일대 역사기행

계절이 초여름을 지나 한 여름으로 향하면서 저녁 시간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기 쉬워졌다. 다행히 서울 도심에 청계천 물길이 뚫리면서 저녁시간 시원한 산책길이 마련되어 아이들과 손잡고 시내 구경을 할만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물길 따라 만들어진 깔끔한 시설에서 오래된 고도, 서울을 느끼긴 어렵기도 하다. 또 배도 조금씩 고파오고.

이때 피마골(避馬-)로 자리를 옮기면 앞에서 얘기한 두 가지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피마골에서 만나는 서울에서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서울을 얘기하며 세대간 격차도 줄여볼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줄곧 산업화를 이룬 한국은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이와 같은 발전은 수도 서울의 물리적 영역 또한 크게 넓혀 놓아 조선시대 한양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기껏해야 한양의 영역은 지금의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그쳤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과는 다른 서울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 서울 사람 사는 모습을 보면 강남과 강북을 두고 차이가 난다고 얘기를 한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하는 얘기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한양에서 한강 남쪽이라면 먼 시골일 뿐이었다. 한양(漢陽)이란 이름 자체가 한강(漢江) 북쪽을 이르는 말[山南江北]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전 한양도 북촌과 남촌이 있어 살림살이가 달랐다. 북촌은 주로 높은 양반들이 살았던 까닭에 큰집이 줄지어 있고 큰 점포도 여럿 있었다. 안국동과 청운동과 같은 북촌 사람들은 말이며 가마가 있어 움직이는 행렬도 거창했다. 이에 비해 남촌은 남산 자락 아래로 그늘진 곳에 집을 지어 축축한 골목길이 있을 뿐이었다. 단지 선비임을 목숨처럼 귀하게 여긴 생원님(샌님)이 그 이름으로 남산골을 지켜주었다. 딸각거리는 나막신 소리만이 사람 사는 곳임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이 북촌과 남촌은 개천(청계천)이 기준이 되었다. 인왕산과 백악(白岳)에서 시작된 개천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동안 한양을 위아래로 나눈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한양을 나누는 큰길도 동으로 흘러가 광화문 아래에서 조금 내려온 길이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이어졌다. 이 길이 운종가로 한양 도성 안에서 제일 큰길이었다.

그런데 운종가와 닿아 있는 광화문 길은 육조거리였다. 지금으로 보면 정부종합청사길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니 당연히 많은 관료들이 이 길을 지나갔다. 이것이 하급관료나 서민들로 볼 때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멀리서 말을 타고 오던 대감나리 행차에 길을 가던 아낙이던 봇짐장수던 모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하급관료도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평민은 머리를 굽히니 귀찮고 하급관료는 말에서 내리고 타기를 반복하니 바쁜 업무에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좁지만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길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종로통 큰 길 뒤로 조그마한 골목길이 생긴 것이다.

말을 피한다고 뜻으로 ‘피마골’로 불리는 골목길은 평민들을 위한 길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 평민들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으슥하고 좁은 길이지만 술집과 음식점이 이어졌다. 술집 가운데 피마골을 대표했던 곳은 ‘목로주점’이었다. 지금의 당주동, 청진동, 무교동, 인사동에 많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던 사람이 계속 오니까 외상술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 주인은 손님 인상을 기억할만한 표식을 해놓고 그 아래 줄을 그어 기억했다. 지금 술값을 긋는다고 하는 말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목로주점은 술 한 잔 금방 하고 가는 곳인 만큼 손님들이 서서 술을 서서 마시곤 했다. 그래서 ‘선술집’이란 말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피마골 밥집으로는 장국밥집과 국수집이 많았다. 양지머리 우려낸 국물에 밥을 말아 낸 장국은 한 끼 식사로도 좋았다. 장국밥집은 문밖에 울긋불긋한 등을 달고 국수집은 백지를 찢어 늘어뜨려 놓아 표시로 삼았다.

조선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많은 술집과 식당이 피마골을 가득 채우고 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널리 알려진 고갈비(고등어구이)를 찾아 피마골로 들어갔던 기억은 한 번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1980년 대 말 데모가 한창이던 시절, 전경을 피해 술집에 들어간 김에 술 한 병 놓고 시국을 토론하던 시절, 조금 여유가 생겨 찾아간 서린동과 무교동 일대 시뻘건 낙지볶음 한 그릇, 빈대떡 한 접시에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조금은 좁고 조금은 허술해 보이는 곳이지만 여름 저녁, 서울 구경 삼아 자녀들과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따로 설명하는 번거로움이 아니더라도 알려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박광일/<아빠의 답사혁명> 저자 ts@travelsto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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