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수당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 2016년 여름, 서울시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서울시 청년수당 직권취소를 반대하는 대형 펼침막이 걸려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 6개월은 스트레스 없이 오롯이 나에게 투자하고 싶었다…. 발 닿는 대로 관심 있던 분야에 발을 담가보았다. 꼭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곧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300만원의 값비싼 물건을 쥐여 준다 해도 6개월의 영양제 같은 그 시간과는 절대 바꾸지 않을 거다.”(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2019 청년수당 에세이 모음집’ 46쪽)
2019년 서울시로부터 청년수당을 받은 한 청년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며 쓴 에세이의 일부다. 청년수당은 서울에 거주하는 만 19~34살 미취업 청년에게 진로 이행을 위한 활동을 지원하는 수당으로 매월 50만원씩 최장 6개월 동안 지급된다.
한 가지 확실히 짚어야 할 것은 서울시 청년수당이 기본소득은 아니며, 그저 현금 ‘수당’을 지급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기본소득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서울시 청년수당은 특정 연령대의 미취업 청년으로 한정된다. 기본소득의 목적이 소득을 보장하는 것 그 자체라면 청년수당은 구직활동 촉진과 역량 강화, 진로 지원이라는 목적을 띤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만 24살 청년에게 분기별로 25만원씩, 1년 동안 총 100만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경기도 청년기본소득과는 차이가 있다.
서울시 청년수당은 기본소득과 관련해 생각해볼 만한 지점들이 있다. ‘한창 일할 나이’로 여겨졌던 노동가능인구인 청년층에게 지급된 최초의 돈이라는 점에서 청년수당은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란은 기본소득 논의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현재 청년수당이라고 불리는 정책의 본래 명칭은 ‘청년활동 지원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지난 2015년 청년을 특정한 직업훈련프로그램이나 일자리로 유도하는 정부의 실업대책이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구상된 것이다. 사업의 취지는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를 기획하는 자율적인 활동을 직접 지원해보자는 것이었다. 청년은 자신의 활동 계획서를 제출하고, 서울시는 이 계획서를 바탕으로 선정한 청년들에게 심리상담, 진로탐색 등 일련의 서비스와 함께 활동 기간 동안의 소득을 보장해준다. 현재 최장 6개월 동안 월 50만원의 현금을 주는 ‘청년수당’은 이 ‘금전적 지원’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정책이 알려진 직후 부각되었던 것은 청년들에게 현금을 지급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언론과 정치권에선 기본소득을 표방했던 성남시의 청년배당과 한데 묶어 청년수당을 ‘청년 대상 현금복지 정책’으로 다루었고, 이런 구도에서 청년수당은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물고기를 직접 주는 것이냐”는 비아냥에 시달렸다. 정부여당은 청년수당이 ‘시혜’라고 비판했다. 한창 구직과 노동에 힘써야 하는 청년들에게 ‘던져주는’ 자선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반박했다. 청년들이 사회의 장래를 책임질 수 있도록 효과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정책 구상 과정에 참여했던 청년활동가들은 청년수당이 시민으로서 응당 보장받아야 할 ‘권리’라고 주장했다. 불쌍해서 던져주는 자선도, 미래에 기대되는 수익을 요구하는 투자도 아닌, 청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 권리라는 것이다.
청년수당의 운명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은 청년이라는 노동가능인구에게 지급되는 현금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의 장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2016년 여름, 정부와 서울시의 줄다리기가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이 논쟁은 공론장이 아닌 법적 절차를 통해 종결되었다. 서울시가 시행하려던 청년활동 지원사업을 정부가 직권으로 취소하면서 청년수당 지급은 일시 중지되었고, 촛불정국과 함께 해가 바뀐 2017년부터 재개되었다.
지난해까지 5만3천여명의 청년들이 서울시로부터 청년수당을 받았다. 그동안 청년수당의 존폐 문제를 둘러싸고 중앙 정치 무대를 달구었던 갈등은 이 돈이 실제로 활용되는 양상에 대한 논쟁에서 이어져왔다. 일부 언론은 청년수당이 대부분 생활비로 소비되면서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고 있어 문제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이 돈이 효과적이지 못한 투자이자, 사실상 ‘시혜’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돈을 직접 수령하고 사용한 당사자들은 청년수당을 어떻게 경험하였을까? 청년수당이라는 제도가 구상되고 논쟁을 거쳐 실행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필자가 만난 청년수당 참여자들은 현재의 생활, 미래에 희망하는 직군, 그에 따라 청년수당을 활용하는 방식 모두 다양했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지점을 공유하고자 한다.
첫째, 청년수당은 청년들에게 이 돈이 없었더라면 그만큼을 마련하기 위해 원치 않는 노동에 지출했어야 할 시간을 확보해주었다. 이 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물론 이 시간과 돈을 활용하여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선 청년들도 있다. 그렇지만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모두가 가시적인 ‘성과’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성과와 무관하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이 현재를 옭아매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잠시 벗어나 더 나은 미래를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안정성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청년수당은 미취업 청년들에게 ‘사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청년수당을 받은 청년들은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여겨졌던 ‘국가’, ‘공공’, ‘사회’의 실체를 느끼게 됐다. 청년수당은 노동을 통해 얻은 수입도, 재테크를 통해 올린 수익도, 가족에게 받은 용돈도 아니다. 사회가 지급한 돈이다. 서울시가 다달이 청년수당을 입금하는 은행 카드를 가지고 편의점에서 줄을 서 있다가 자신과 똑같은 카드로 앞에서 결제하는 다른 청년을 보았다던 연구 참여자가 있었다. 그는 일각에서는 여전히 떳떳하지 못한 시혜라고 낙인을 찍는 이 돈을 사회로부터 함께 수령하고 경험하는 동료 시민을 만나서 반가웠다고 술회했다.
청년수당을 직접 받아본 청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기본소득을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유의미한 질문들을 던진다. 노동가능인구에게 현금을 지급해도 되는가? 왜 지급해야 하는가? 이 돈을 지급받은 개인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이 질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개인에게 무엇을, 어디까지 보장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의 일부이다.
최근 기본소득 의제가 우리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 정책이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기본소득이 오늘날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키고 나눌 수 있는 공론장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청년수당의 경험 역시 이 공론장에서 풍부하게 해석되고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조민서 전 서울시 청년불평등완화 범사회적대화기구 운영위원 (미국 위스콘신대 사회학 박사과정)
epeephan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