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이 19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거래 관행 개선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국 방송 바닥에서 독립피디·제작사를 한다는 것은 방송사 앵벌이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제가 밥줄을 내놓고 (내가 겪은 일을 언론에) 공개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번에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지난 15년 동안 해온 이런 생각이 굳어질 것 같아서입니다.”
고 박환성 피디가 지난 7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지상파 방송사의 ‘갑질’을 폭로하며 한 말이다. 자연·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두각을 드러낸 박 피디는, 폭로 직후 떠난 남아프리카 촬영에서 후배인 김광일 피디와 함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죽음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었던 독립피디들과 외주제작사들이 불합리한 관행을 바꾸려는 싸움을 이어받았다. 한 번 방송사에 찍히면 일감이 끊길 수도 있는 이들이 이름을 드러내고 단체 행동에 나선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을들’의 싸움이 시작된 지 5개월째, 정부가 드디어 개선책을 내놨다. 19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5개 부처가 합동으로 마련한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 관행 개선 종합대책’이 발표됐다. 이번 발표는 두 독립피디가 세상을 뜬 이후인 지난 8월 대통령이 ‘실효성 있는 외주제작 공정거래 대책 마련’을 지시한 데 따른 것으로, 5개 부처를 아우르는 정부 차원의 종합대책을 내놓은 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종합대책은 외주제작시장의 고질적 문제점인 △불충분한 제작비 지급 △저작권과 수익의 자의적 배분 △과도한 노동시간과 인권침해 등 불공정거래 관행을 해결하기 위한 5개 핵심 개선과제와 16개 세부과제로 구성됐다. 먼저 방통위는 △외주제작 인력의 보험 가입 확인 여부를 방송평가 항목에 신설하고 △방송사의 외주 인력 안전대책 수립을 재허가 심사에 반영한다. 방통위는 또 방송사가 자체 프로그램 제작비에 견줘 외주 프로그램 제작비를 ‘후려치는’ 관행을 바꾸고자, 방송사별 자체 프로그램 제작 단가 제출을 재허가 조건으로 부과한다. 고용부는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외주사를 근로감독 대상에 포함해 집중 점검하고, 문체부는 기존 방송 분야 표준계약서에 더해 ‘방송작가 집필표준계약서’를 새로 만든다. 방통위와 문체부는 불공정거래와 인권침해 등을 신고할 수 있는 ‘콘텐츠 공정상생 센터’를 함께 운영한다.
독립피디·외주제작사들은 정부의 종합대책 발표를 환영하면서도, 대책의 실효성을 우려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독립피디는 <한겨레>에 “5개 부처가 합동으로 개선책을 만든 건 진일보한 일이지만 성공 여부는 대부분 법 개정에 달려 있다”며 여소야대 국회에서 법 개정안이 통과할 수 있을지 우려를 표했다. 또 “방통위의 방송사 재허가·재승인 심사는 3~4년에 한 번씩 하는 데다, 방송사가 조건을 지키지 않더라도 ‘조건부 재허가’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 효과를 발휘할지도 의문”이라며 “과거 사례를 보면 이런 개선책들이 일회성에 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상설기구·협의체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효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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