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방송>(EBS)이 간판 프로그램 <다큐프라임>의 외주제작비를 둘러싸고, 한 독립다큐멘터리 피디와 갈등을 벌이며 ‘갑질’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 논란은 교육방송을 포함한 지상파 방송사들의 불공정거래와, 정부지원금을 ‘협찬’으로 분류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로 확장하는 모양새다. 13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교육방송과 박환성 피디(블루라이노픽처스 대표)는 지난해 8월 <다큐프라임-야수의 방주>(가제) 2부작을 총 1억4천만원에 제작하기로 계약했다. 이후 박 피디는 제작비 부족분을 충당하고자 지난 2월 한국전파진흥협회의 ‘차세대방송용 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에 지원했고, 4월에 지원작으로 뽑혀 1억2천만원을 지원받게 됐다. 갈등은 박 피디가 “정부지원금 가운데 일부를 교육방송에 ‘간접비’로 내야 한다”는 교육방송 관계자 발언을 ‘폭로’하면서 불거졌다. 간접비(간접제작비)는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과 달리, 편성·송출·홍보 등 방송사의 인력과 시설을 활용하는 데 드는 비용을 통칭한다. 교육방송은 “콘텐츠 제작비로 써야 할 정부지원금을 방송사의 간접비로 귀속시키는 근거를 알려달라”는 박 피디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 대신 박 피디의 계약위반 행위들을 문제삼는 공문으로 대응하자 박 피디가 사건 공론화에 나선 것이다. 박 피디의 분쟁조정신청을 접수한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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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제작지원금을 ‘협찬’으로 취급? 박 피디가 소속된 한국독립피디협회는 지난 3일 성명을 내고 이 문제가 “교육방송을 비롯한 방송사업자들이 독립제작사/독립피디를 상대로 벌여온 오랜 관행이자 방송계의 대표적 적폐”라고 했다. 실제 박 피디의 폭로 뒤에 다른 독립피디들이 <한국방송>(KBS), <에스비에스>(SBS) 등에서 경험한 사례를 협회 쪽에 제보하고 있다.
정부는 영세 독립제작사·피디 경쟁력 제고와 방송 품질 개선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콘텐츠진흥원,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한국전파진흥협회 등을 통해 방송 프로그램 제작지원 사업을 벌여왔다. 그런데 독립피디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방송사들은 독립제작사·피디가 이런 사업에 공모해서 지원금을 받을 경우 해당 지원금을 ‘협찬’으로 간주해 지원금의 20~40%를 방송사 간접비 또는 송출료 명목으로 걷었다.
2009년 방송한 <다큐프라임-말라위, 물 위의 전쟁> 예고편 화면. 박 피디는 이때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제작지원을 받았다. 박 피디가 이 사실을 <교육방송>에 전달하자 교육방송은 원래 지원하기로 한 제작비의 60%를 차감하는 내용의 ‘변경합의서’를 요구해왔으며, 박 피디는 어쩔 수 없이 서명해야 했다고 전했다. 교육방송 화면 갈무리
어떤 경우에는 원래 방송사에서 지급하기로 한 제작비를 깎거나 지급하지 않는 방식을 활용하기도 했다. 박 피디의 경우 2009년 교육방송에서 <다큐프라임-말라위, 물 위의 전쟁>을 제작할 때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제작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방영 직전 교육방송이 원래 지원하기로 한 제작비의 60%를 차감하는 내용의 ‘변경합의서’를 요구해와, 어쩔 수 없이 서명해야 했다.
교육방송을 비롯해 한국방송·에스비에스 쪽은 “정부지원금을 사기업의 협찬금과 똑같이 취급하지 않는다”면서도 “프로그램·제작사·지원사업별로 처리 방식이 다르다”고 했다. 정부지원금이 포함된 프로그램 제작의 경우 일부 제작비 조정이 이뤄진다는 여지를 둔 것이다. 다만 프로그램에 따라 제작비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관행’이라고 부를 만큼 정해진 틀을 만들기가 쉽지 않고, 어떤 경우든 당사자간 협의를 통해 합리적 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고 했다. 제작비 일부를 간접비·송출료로 귀속하는 근거를 두고는 “방송사 인력·시설을 활용해 해당 프로그램을 편성, 방영하는 만큼 방송사에서도 비용을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협찬고지 등에 관한 규칙’에서도 협찬의 종류를 공사 따로 구분하지는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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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태조사 바탕으로 제도 정비 필요 방송사들이 한목소리로 “협의가 가능한 부분”이라고 말하지만, ‘을’인 독립피디들은 이런 협의 과정이 지금보다 더 투명하고 공정할 수 있도록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부는 외주시장 공정성을 높이려고 2013년 ‘방송 프로그램 제작 표준계약서’를 제정해 방송사·제작사에 사용을 권장했다. 교육방송은 한 발 나아가 2014년 내부 지침으로 ‘외주협력제작사 협력상생 방안’을 마련해, 제작권 부여를 명문화하고 간접비·제작비·인센티브 비율을 명시했다. 하지만 이런 ‘협력상생 방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계약 당사자인 독립피디들에게 계약 전 제대로 고지되지 않았다. 또 해당 방안에서 정부예산이 지원되는 협찬을 다른 협찬과 분리하긴 했지만, 간접비·수수료 비율이 낮은 정도다.
“제가 밥줄을 내놓고 (이 사건을 외부에) 공개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가 되지 않고서는, ‘한국 방송 바닥에서 독립피디·제작사를 한다는 것은 방송사 앵벌이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라는 지난 15년간의 축적된 생각이 굳어질 것 같아서입니다.” 박 피디의 말이다. 여러 정부기관과 규정이 얽힌 상황이라, ‘교통정리’를 위해서는 실태조사가 먼저라는 주장이 나온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노웅래 의원실(더불어민주당)과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추혜선 의원실(정의당)에서 자료 조사에 나섰다. 노웅래 의원실 관계자는 “방송사가 정부지원금을 협찬으로 간주하는 건 문제 상황이라고 본다. 충분한 자료 수집과 분석을 바탕으로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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