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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29살에 과로 병원비 300만원, 청년 뼛가루 갈아마실 거냐”

등록 2023-03-23 12:02수정 2023-03-23 17:48

‘주69시간’ 정부안에 20·30대 비판 의견 쏟아져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데 삶의 질 어디 있어?”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에 있는 시뮬레이션 기반 가상모형 플랫폼 기업인 이웨이트를 방문해 직원들에게 휴가 사용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에 있는 시뮬레이션 기반 가상모형 플랫폼 기업인 이웨이트를 방문해 직원들에게 휴가 사용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 69시간 근로시간 개편,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난 18일 청년유니온이 24일 이정식 고용노동부장관과의 간담회를 앞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간략한 게시물 하나를 올린 뒤, 나흘 만에(22일 오후 4시 기준) 청년 210명의 의견이 쏟아졌다.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별다른 조직적인 홍보를 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작은 사업장, 불안정 청년 노동자들이 많은 의견을 전해줬다”고 말했다.

의견을 보내 온 이들 가운데 168명이 100인 미만 사업장 또는 구직자·프리랜서 노동자였다. ‘엠제트(MZ) 세대의 의견 청취’를 강조하며 연일 현장 노사 간담회를 열고 있지만, 주로 대기업 사무직 청년이나 자체적으로 꾸린 청년 모임을 만난 정부에 아직 닿지 못한 청년 노동자의 목소리다.

이날까지 보내 온 의견에서 31살 하청 노동자는 “52시간 근무조차 마치고 나면 아무것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일을 쉬고 있는 33살 구직자는 “하루 10시간 주 6일 일했을 때 일 그만두고 체력 회복되기까지 일년 넘게 걸렸다”고 했다. 5인미만 업체에서 일하는 23살 제과사는 “개인의 일부를 할애하는 노동에서 시간은 절대 단순한 숫자를 의미할 수 없다”고 했다.

민주노총 청년 활동가들이 1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근로시간 기록·관리 우수 사업장 노사 간담회에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를 향해 주69시간제 폐기를 촉구하며 기습시위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민주노총 청년 활동가들이 1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근로시간 기록·관리 우수 사업장 노사 간담회에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를 향해 주69시간제 폐기를 촉구하며 기습시위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방안으로 시작된 압축·집중 노동에 대한 고민은, ‘일의 시간’ 앞에 나의 몸, 나의 생산성, 엉망진창인 현실, 끝내 노동자의 존엄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 모습이다.  <한겨레>는 청년유니온에 전해진 ‘보통 청년’들의 의견을 추려서 전한다. 이 의견들은 24일 고용노동부 장관에 전해진다.

나의 몸과 일상

“아이가 둘 있는 직장동료는 한숨이 늘었고, 아이 계획을 가졌던 동생은 모든 것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건강이 안 좋은 동료는 걱정이 한가득이고 체력이 약한 친구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합니다.” (39살, 30인 미만 사업장)

“하루 10시간 주 6일을 일했을 때는 일 그만두고 체력회복 되기까지 일년 넘게 걸렸다. 운동 부족이라고?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면서 운동하고 건강식 챙겨먹을 시간이 어디 있는지? 노동자가 한번 쓰고 버릴 부품인가?” (33살, 구직자)

“거의 매일 야근하면서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던 경험이 있다. 모니터를 오래보는 바람에 눈도 침침해지고, 손목 터널증후군도 생기고, 스트레스로 인해 불면증과 과호흡 증상을 겪기도 했다.” (37살, 전문직)

“근로시간 개편을 하면 저출생을 넘어 초저출생의 시대로 갈 것은 뻔한 일인데… 듣자하니 고용노동부 공무원들도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연장근무에 시달린다는데 당신 부하들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조차 없는 겁니까?”(33살, 30~100인 미만 사업장)

불신이 당연한 현장

“업무 개선을 고민하지 않고, 몸을 더욱 혹사하지 않는 직원 개인을 탓하는 노동은 지금까지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지켜지지 않는 52시간을 넘겨 더 긴 시간을 기업에 허용한다면, 정부가 나서서 이런 만행을 허용해주는 꼴”(30살, 미디어·문화, 30인 미만 사업장)

“그나마 시간이라도 정해져 있어서 집에라도 갈 수 있는데, 아주 사장 죄책감 덜어주려고 혈안이 됐군요. 일을 더 시키려면 사람을 더 뽑으라고요. 안 그래도 갈리는 청년들 뼛가루까지 갈아마시지 말고요”(34살, 30인 미만 사업장)

“유연근무제로 워라밸을 만든다? 지금 연장근로 포함 52시간으로도 만들어지지 않는 워라밸 환경이며, 대체휴가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됨.”(36살, 사회복지사, 30인 미만 사업장)

“설계판 한달에 두 번 날새고 매일 11시까지 일하고 결국은 1년도 못 넘기고 병원비로 300씀”(29살, 설계, 300인 이상 사업장)

의욕 고갈

“개발업무를 주로 하고 있어 일과시간에는 고객사와 미팅을 하고 밤에 개발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의력은 새로운 경험과 휴식 속에서 나옵니다. 근로시간제도 개편을 하더라도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합니다.”(32살, 개발자, 30~100인 미만 사업장)

“이렇게 근무를 하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죠. 51시간~52시간가량 근무 또한 회사에 종속된 삶인데, 60시간 이상 근무는 회사에서 잠자고 출근하라는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네요.”(31살, 행정·서무, 30인~100인 미만 사업장)

일 앞의 존엄

“노동의 시간을 줄여가는 역사에서, 아직까지도 긴 노동으로 돈을 벌어야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는 누굽니까? 표준이 되는 기본법의 기준은 어떤 노동자가 되어야 합니까? 이번 개편안에는 그 어떤 숙고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하는 노동자를 기준으로 제도를 설계해 주십시오.” (29살, 사무직, 30인 미만 사업장)

“매일 9 시간, 주 45 시간 근무를 하였습니다. 직업은 제과사로 친구들과 가벼운 농담 삼아 위생적인 공사판이라고 할 정도로 강도 높은 근무를 이행하였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선택에 따른 행위여도, 상황에 따른 타의적인 행위여도 개인의 일부를 할애하는 노동에서 시간은 절대 단순한 숫자를 의미할 수 없습니다.” (23살, 제과사, 30인 미만 사업장)

“장시간 노동 이후 휴식을 취하면 노동으로 인한 데미지가 모두 다 사라질까? 애초에 한 명의 인간에게 그런 데미지는 왜 주는가? 주 69시간 장시간 노동이 가능하다는 거 자체가 노동자 건강권에는 위험 신호다. 노동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런걸 혜택이라고 여길 리가 없다.”(37살, 예술, 프리랜서)

“중심부 노동시장의 근로조건은 그 외의 노동조건을 부정적인 쪽으로 견인하는 효과가 있던데 정규직도 초장시간 노동이 가능해지면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들은 더더더더더 많이 일하게 될 것 같아요.”(29살, 사무직, 프리랜서)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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