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IT) 기업에서 일하는 ㄱ씨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뒤 돌봄을 위해 퇴사할 결심을 했다. 퇴사 언급을 하자 회사 쪽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청구권’을 소개하며 ㄱ씨가 회사에 남기를 제안했다. ㄱ씨는 급여 삭감 등을 협의한 뒤 근로시간을 줄여 가족 돌봄과 업무를 병행하며 퇴사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한국노동연구원 ‘근로시간 단축청구권 활성화 방안 연구’ 노동자 심층 인터뷰 중)
정부가 노동자의 선택권과 휴식권을 보장한다며 내놓은 주당 최대 69시간(주 7일 기준 80.5시간) 노동시간 개편안을 내놨지만, 정작 현장에선 노동자의 노동 유연성 확보를 위해 이미 마련된 제도조차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신·육아 등을 위해 합법적으로 회사에 업무 시간을 줄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축제도’ 활용율이 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20년부터는 돌봄·학업 등까지 범위가 확대됐지만 이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노동자가 열에 여섯에 불과한데다 이용률은 되레 줄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고용노동부 의뢰로 작성해 최근 보고한 ‘근로시간 단축청구권 활성화 방안 연구’ 보고서를 22일 보면, 근로시간 단축제 활용자는 2018∼2021년 사이 임금 근로자의 1.3∼1.9%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 안정성과 노조 유무에 따른 격차도 나타났다. 2021년 기준으로 임시·일용직(0.4%)의 제도 활용률은 상용직(2.3%)의 6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직종 중에서는 사무 종사자(2.9%), 관리자(2.4%)의 활용률이 다른 직종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노조 가입 노동자(3.7%)가 비노조원(1.1%)보다 활용률이 높았다.
2020년부터 기존 임시·육아에 더해 가족돌봄·본인 건강·은퇴 준비·학업 등까지 근로시간 단축 청구를 할 수 있는 사유가 늘었음에도 제도 활용률은 2020년 1.9%에서 2022년 1.8%로 오히려 줄었다.
노동자 상당수는 제도 자체를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이 20살∼60살 미만 노동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근로시간 단축청구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응답자가 59.2%로 절반을 넘었다. 제도 접근성도 떨어져 ‘활용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응답이 67.6%에 달했다.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제도가 있는지 몰라서’(25.9%), ‘근로자 각자가 고유 업무를 하기 때문에’(18.9%), ‘임금 감소에 대한 우려 때문에’(14.4%), ‘동료들의 업무 부담이 가중 될까 봐’(12.0%) 순이었다.
회사 쪽의 낮은 인식도 걸림돌이다. 업무량 조정 없이 노동시간만 단축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연구 설문에 참여한 아이티 업체 노동자 ㄴ씨는 “오후 3시까지 근무를 하기로 약속하고 급여도 합의 해놓고, 3시가 지나서도 일을 시켰다”며 “부모님을 케어하기 위해서 근로시간 단축을 한 건데 주말에도 톡하고 전화하고, 6개월을 하다가 스트레스 받아서 못하겠더라 싶었다”고 말했다.
단축 이후 동일한 업무 또는 동일한 임금으로 복귀가 가능하도록 보장하지만, 이에 대한 벌칙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은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교육서비스업 노동자 ㄷ씨는 “제도의 강제성이 약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대표나 관리자들의 마인드에 따라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며 “지키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노동부에 신고할 수 있게 보완해야지 아니면 허울뿐인 제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69시간제’ 같은 노동시간 개편안을 내놓기 이전에 단축청구권 같은 제도라도 제대로 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손연정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겨레>에 “장시간 근로 관행이 오랫동안 지속해 왔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로 일-생활 균형이 무너진 측면이 있다”며 “누구나 생애주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한 상황에서 제도를 적절히 활용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자’는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안도 비슷한 한계에 봉착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연구에 참여한 정영훈 부경대 교수(법학)는 “현재 정부안은 선택권을 보장한다고 하면서도 이미 도입되어 있는 근로시간 단축제를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은 전무한 상황”이라며 “몰아서 쉴 수 있게 근로시간 저축계좌제 도입 등을 언급하지만 노동자의 진정한 선택권을 존중할 수 있도록 조직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근로시간 단축청구권처럼 있으나마나한 제도만 늘어나는 것”이라고 짚었다.
장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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