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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그냥 난 곰이에요”… ‘삼성맨’의 자존감, 성과급에 무너졌다

등록 2023-02-07 07:00수정 2023-02-07 22:21

삼성전자·삼성SDI 노동자 445명 조사
성과급 영향 첫 분석 금속노조 보고서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한겨레 자료 사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한겨레 자료 사진

“저는 진짜 진급에 관심 없었고 월급에 만족도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쌓이더라고요. 고과 시즌만 되면 울었어요.” (삼성 SDI 5년차 이하 30대 노동자) “똑똑한 사람이 ‘마’(최하위 평가)를 받았어요. 마음이 얼마나 그렇겠어요. 사람이 곰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냥 나는 곰이에요, 이런 식으로.” (삼성전자 20년차 이상 50대 노동자)

정부가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을 추진하는 가운데, 성과에 따른 차등 보상을 강조하는 삼성의 임금체계가 노동자에 미치는 영향을 처음으로 조사한 보고서가 나왔다. 조사 결과, 객관적인 성과 측정의 어려움으로 인한 불신과 낙담, 회사에 대한 실망이 나타났다. 노동자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조직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효율 문제도 있었다.

6일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은 지난해 삼성전자와 삼성에스디아이(SDI) 노동자 44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그 중 22명에 대한 면접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 ‘삼성 고과 제도의 현황과 폐해 실태 연구: 삼성전자와 삼성SDI를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설문조사 대상은 생산직(34.4%)과 사무·연구개발직(62.5%), 노동조합원(47.4%)과 비조합원(52.6%) 등이 고르게 분포해 있다.

설문조사 참여자들은 삼성의 임금체계를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70.4%)하며, ‘같은 직급이라도 급여 차이가 큰’(85.6%) 제도로 인식했다. 개인이나 팀 실적에 순위를 매겨 차등 보상하는 전형적인 성과 중심 체계다. 1990년대 초까지 ‘평생 직장’ ‘한 가족’ 구호를 내걸었던 삼성의 인사제도는 1998년 연봉제, 2000년 사업 부문별 이익배분제도 등이 도입되며 성과주의를 확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들은 고과에 따라 최상위인 EX(Excellent, 가)에서 최하위인 UN(Unsatisfactory, 마)까지 5단계로 등급이 매겨지는데, NI(Need Improvement, 라) 등급 이하일 경우 연봉(월급)은 동결 혹은 삭감된다고 한다. 일시적 성과급을 차등하는 수준을 넘어 임금 인상의 기준이 되는 기본급과 연봉에도 영향을 미쳐 임금 격차는 누적적으로 크게 벌어진다.

노동자들은 우선 ‘평가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현재의 고과(성과) 평가는 신뢰할 만하다’는 문장에 75.1%가 부정적으로 답했다. 면접조사 참여자들은 평가 권한을 쥔 중간 관리자들이 ‘지역감정’ ‘술자리 참석 여부’ ‘자신의 여가인 농사짓기에 도움’ ‘만만한 사람’ 등 이해할 수 없는 기준을 활용한다고 언급했다. 불투명한 평가 기준은 진급 순서를 따져 좋은 평가를 몰아주거나 “성과를 내기 위해 잘 돌아가는 걸 자꾸 교체하는”(삼성SDI 노동자) 비효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등급별 인원을 정해놓는 ‘상대평가’(2023년부터 생산직만 해당) 과정에서 여성·육아휴직자·병가자 등에게 낮은 등급을 주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코로나 걸려서 쉬었다고 고과를 안 줌”(설문조사 자유의견) “여자 고과 챙겨주면 욕먹는 거 몰라? 이렇게 말을 했대요.”(삼성SDI 노동자)라고 언급했다.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사회의 차별이 노동자 성과평가 결과에 그대로 반영되는 모습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설문조사 응답자 가운데 ‘아픈 데도 일한 경험이 있다’는 노동자는 70%였다.

‘성과 평가는 직원들에게 동기 부여가 된다’는 문장에 부정적인 응답은 65.3%였다. 성과주의 임금체계 이점으로 경쟁 심리를 자극해 자발적인 동기 부여가 가능하다는 점이 꼽히는데, 이러한 주장에 반하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경영학)는 “정부가 성과 중심 임금체계를 말하지만 특정한 임금 제도만 옳다고 보기 어렵다”며 “삼성 사례처럼 성과 중심 임금체계 또한 평가의 불완전성이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는 만큼 정부의 체계적인 연구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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