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마사업권 수호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권인희 위원장(사진=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시각장애인 안마사에게 직접 들어보니
“인간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5월25일 안마사 자격을 시각장애인 아닌 사람에게도 개방하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온 이후 시각장애인들의 항의가 계속되고 있다. ‘안마사 업권수호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권인희 위원장(52·전 대한안마사협회 회장)을 만나, 안마사들의 ‘반발 이유’를 들었다. 권 위원장은 2002년도에 건국대학교 법학과에서 관련 논문(논문 제목:‘안마사자격제도와 직업선택의 자유에 관한 연구’)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박사과정 재학중이다.
권 위원장은 이번 헌재의 결정이 안마사 자격제도가 뿌리박고 있는 헌법 제34조 5항(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을 무시했다고 본다. 권 위원장은 “안마사 자격제도는, 사회권적 기본권으로써 적극적 의미의 청구권적 기본권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헌재는 헌법 제 15조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자유권적 기본권으로써 소극적 의미의 방어권적 기본권에 손을 들어줬다”라고 주장했다. 권위원장은 미국에서 1936년에 제정된 연방 소유시설 내의 자동판매기, 신문가판대, 매점, 스넥바, 카페테리아 등의 판매시설에 대한 운영권을 일반고용이 어려운 법적 맹인(교정시력 0.1 미만 또는 20도 이하의 시야 결함)에게 부여하게 하고 있는 ‘란돌프-세퍼드법’을 예로 들며, “미국에서도 이러한 보호법이 시행되고 있는데 한국에서 시각장애인들에게 마지막 삶의 수단인 안마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실정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은 “맹인들의 안마권은 단지 시각장애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며 “일반 국민들이 나중에 혹시 시각장애인이 되었을 때 그 뒤의 삶을 보장해 줄수 있는 훌륭한 사회안정망 정책 중 하나다”라고 ‘밥그릇 싸움’으로 비추어지는 것에 대해 국민들의 이해를 당부했다.
다음은 권씨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안마사 제도는 관습법이다”
-이번의 헌재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법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법이 인간 위에 있었다고 본다. 헌재 재판관들은 마치 성서의 율법주의자들처럼 생각했다. 헌법34조에서도 보장된 장애인에 대한 국가나 사회의 보호 의무를 졸지에 무너뜨렸다. 권력 분립의 원리에서는 ‘다수파’ 기관과 ‘비다수파’ 기관이 있다. 행정부나 입법부같은 ‘다수파’기관은 다수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으나 사법부와 같이 임기제를 채택하는 ‘비다수파’기관은 소수의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이런 의무를 저버린 비정한 결정이다. 미국에서는 1936년에 제정된 시각장애인 보호법인 ‘란돌프-세퍼드법’에 대한 ‘딴죽’이 한번도 없었다. 미국에서도 이런 보호법이 시행되고 있는데 한국에서 인정을 못한다는것은 어불성설이다.
-안마사제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제도라 생각고 있지만 오해다. 모든 비장애인들도 장애에 노출되어 있다. 얼마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시각장애인 안마사 제도는 앞으로 장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혹 있을지 모르는 만일을 위해 사회에서 마련할 수 있는 사회보장망의 하나다.
-시각장애인들에 왜 안마사라는 직업이 적합하다고 보나?
=안마는 손으로 시술하는 거다.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시력을 상실한 대신 촉각이 발달한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적합한 직업이다. 1913년도부터 현재까지 약 1세기 동안 시각장애인의 직종으로 모든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일종의 관습법처럼 여겨졌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다. 정부에 바라는 점은?
=우선, 잘못된 헌재 결정을 수용할 수 없다는 우리의 의견을 전달할 것이다. 또한 종전에 보건복지부령에 있어 다소 견고하지 못했던 안마사 자격증 제도를 확고하게 법률로 승격을 해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즉, 지금의 ‘스포츠 맛사지’나 ‘발맛사지‘와 같이 3-4개월 돈주고 배워서 자격증이 나오는 ‘유사안마’의 형태를 근절시킬 강력한 법률을 요구할 것이다.
“극단적인 투쟁 계속 될 것”
-지금도 마포대교에서는 위태로운 고공시위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시위에 참여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무언가 뚜렷한 해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저런 집회는 계속 된다고 본다.
-국립 서울맹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중인데?
=나도 맹학교 10회 졸업생이다. 가슴이 아프다. 현재도 유사 안마행위업소들 때문에 취업이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 후배들의 앞길이 이제 더 힘들어 졌다. 맹학교에서 배우는 만큼의 노력도 없이 안마사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자라나라는 어린 후배들의 꿈을 꺾어서는 안된다.
“안마사제도는 비장애인들에게도 혜택”
-시각장애인 안마사이면서 박사과정의 법학도인데?
=강원도 원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7살때 망막이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나도 중도 실명자다. 3번의 수술을 했으나 결국 양쪽다 실명했다. 퇴원하고 집에 왔는데 동네 꼬마들이 놀리더라. 화장실 찾아갈 때 내 뒤를 쫒아 다니면서 ‘장님’이라고 놀려댔다. 그때는 정말 분했다. 다시 시력을 되찾고 싶어서 당시 안과의 최고명의 였던 공병우박사를 찾아가 진료를 받았으나 돌아온 대답은 “17년 동안 보고 살았으니 앞으로 못봐도 괜찮다”였다. 그래도 그분이 쓴 ‘맹인생활지도론’을 보면서 점자도 익히게 되었다. 생활이 막막해 73년도 19살에 국립맹학교를 입학했다. 원래 나는 원래 드라마 작가가 꿈이었다. 안마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졸업후 안마할 생각은 하지도 안았다. 하지만 당시에 문학이라는 게 배고픈 시절이었다. 결국 작가의 꿈은 포기하고, 맹학교에서 배운 안마와 침시술로 연명하며 살았다. 그런데 81년도에 갑자기 전두환이 집권하며 무면허 의료 행위에 대한 단속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한의사협회에 고발당해 입건되고 벌금 10만원을 물었다. 더이상 안마사 생활도 하지 못했다. 그 뒤 ‘서울맹인대림원’(중도실명자들을 위한 직업재활 교육기관)에 안마와 침술을 가르쳤다. 그곳을 그만두고 1985년도에 안마사협회중앙회사무총장을 거쳐 95년 안마사협회장이 되었다.
-법학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협회 일을 하면서 안마사제도 정착에 주력했고, 안마사가 안정적으로 직업 수행을 할 수 있도록 권익과 복리 증진을 위해 일해 왔다고 자부한다. 89년도에 안마사협회 사무총장을 그만두고 95년 12월에 회장이 되어서 2001년 12월까지 회장을 했다. 법학을 특별히 선택한 이유는 사람이 질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라는 평소의 생각때문이었다. 특히 장애인 복지에 대해서 그 동안의 장애인 복지의 틀이 장애인을 불쌍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자선의 틀에서 정부정책에 시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 틀을 깨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인권을 바탕으로 한 장애인정책을 세우고 연구하고 실질적으로 국가정책으로 반영하기 위해서 법을 전공하게 됐다. 방송통신대를 졸업한 후 2002년도에 건국대 대학원에 입학해 ‘안마사자격제도와 직업선택의 자유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2005년도에 석사를 받고, 현재 박사 3학기째다.
〈한겨레〉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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