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레나이카의 왕 아르케실라우스 2세가 실피움 포장을 감독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기원전 550년 무렵의 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곧 시저는 로마의 세계 제패를 이끈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로마의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정으로의 물꼬를 튼 독재자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닌다. 정치와 군사 측면에서 불세의 능력을 발휘한 그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등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적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정적의 부인과 바람을 피웠다는 얘기도 전해져온다. 시저의 보물창고에 보관돼 있었다는 500㎏에 이르는 향신료는 이런 얘기들과 함께 ‘정력제’였다는 소문을 낳았다.
로마인들은 이 향신료를 ‘실피움’(그리스인은 실피온)이라 불렀으며, 향수나 치료약으로 썼다. 특히 ‘레이저’라는 이름의 조미료로 만들어 온갖 음식에 다 넣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실피움은 폭군 네로 황제 시절인 1세기 이전에 사라졌으며, 멸종 원인은 2000년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미국 뉴햄프셔대 연구팀은 최근 공개저널(오픈 액세스)인 <보존과학 프런티어>에 게재한 논문에서 “실피움은 인간 활동이 일으킨 기후변화의 첫번째 희생양이다. 실피움의 교훈을 깊이 새겨 현대 풍미의 근본을 이루는 식물들이 사라질 위험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DOI :
10.3389/fcosc.2021.785962)
기원전 90년 무렵 키레나이카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더 크고 좋은 집을 짓고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땅을 개간하기 위해 고원의 숲을 베어냈다. 삼림 벌채는 강수 패턴을 바꿔놓았으며 실피움이 자라던 언덕이 크게 침식됐다. 연구팀은 리비아 북동부의 벵가지 인근의 한 동굴에서 발굴 작업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논문 공저자인 폴 로버트슨 뉴햄프셔대 교수는 “삼림 벌채와 경작지 팽창으로 인한 국지적 기후 변화가 실피움 멸종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 연구팀의 결론”이라고 했다.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 식물학의 창시자 테오프라스토스, 술 이름으로도 남아 있는 로마 작가 플리니 더 엘더 등은 실피움과 레이저에 관해 많은 글들을 남겼다. 플리니는 실피움을 개한테 물렸을 때나 뱀독, 치질 등에 치료약으로 쓸 수 있다고 극찬했다.
고대 키레네의 은화에 새겨진 실피움 씨앗 모양. 위키미디어 코먼스
실피움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채소였다. 실피움은 정력제뿐만 아니라 피임이나 낙태 등에도 쓰여 당시 자유로운 성관계와 사랑을 상징하기도 했다. 현대 하트 모양이 실피움의 씨앗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유력한 가설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실피움이 로마인한테서 큰 사랑을 받았음은 당시 동전(주화)에도 드러나 있다. 로마인들은 고대 리비아에서 동전을 주조할 때 앞면에 실피움 그림을 넣고 신이나 황제의 얼굴은 뒷면에 새겼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실피움이 0.5m까지 자라며 두꺼운 다년생 뿌리를 갖고 있고 줄기 껍질은 검은색을 띠고 있다고 묘사했다. 특히 뿌리를 자르면 우유 같은 즙이 배어나와 레이저라는 물질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플리니는 77년에 지은 저서 <자연사>에서 로마인에게 사랑을 받았던 실피움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실피움 멸종에 대해 이전 연구자들은 과잉 수확하거나 가축 사료로 과도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하지만 뉴햄프셔대 연구팀은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실피움은 기원전 630년 무렵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로 지배했던 현대 리비아의 동부지방인 키레나이카의 야생에서만 서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피움은 회향과 인도 요리에 종종 쓰이는 향신료 아위가 포함돼 있는 ‘페룰라’(아위속)에 속한 종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의 페룰라도 키레나이카의 1만㎢ 땅에만 야생 덤불로 남아 있다.
키레네 동전에 새겨진 실피움 모양. 위키미디어 코먼스
연구팀은 고대인들의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실피움이 페룰라의 잎사귀 및 줄기와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대 주화에 묘사된 실피움 줄기에도 페룰라처럼 수직으로 된 줄무늬가 있다.
페룰라는 발아 자체가 매우 까다롭다. 페룰라가 휴면기에서 깨어나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습기가 있는 곳에서 5도 이하의 저온환경에 장기간(4∼8주) 노출돼야 한다. 실피움도 페룰라만큼 싹을 틔우기가 어려웠다. 테로프라스토스는 실피움이 ‘재배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썼고, 플리니는 ‘실피움을 재배하려는 모든 노력은 씨앗을 뿌린 곳을 매우 황량한 불모의 땅으로 만들고 만다’고 표현했다.
가느다란 세로 줄무늬가 특징인 페룰라의 줄기. 키레네 동전의 실피움 줄기와 닮았다. 뉴햄프셔대 제공
고대 문헌에는 실피움의 경작 범위와 키레나이카의 환경 변화가 잘 기록돼 있다. 키레나이카 중에서도 현대 연간 강수량이 가장 높은 고대 키레네 도시 지역이 실피움의 서식지였다. 헤로도토스는 토착 리비아인들이 그리스인들한테 정착지로 안내한 곳을 ‘하늘의 구멍’이라고 일컬어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많은 곳임을 표시했다. 실피움은 비옥하고 숲이 우거진 리비아 제벨 알-아크다르 고원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쪽에서 자랐다.
실피움은 수확 뒤에는 로마와 그 너머까지 수출됐다. 키레네 왕은 실피움 수확량을 제한하고 서식지에 울타리를 치도록 했다. 논문 저자인 폴 폴라로 뉴햄프셔대 연구원은 “식민지 지배자들은 실피움이 쇠락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보존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기후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어떤 노력도 결국에는 무의미했다”고 말했다.
현대 기후변화도 비슷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웃 국가 일부 지역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허브에서 추출한 수액인 아위는 인도에서 널리 쓰인다. 하지만 지역 기후변화로 허브 서식지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밀레니엄종자은행을 운용중인 영국 큐왕립식물원의 모니크 시몬즈 교수는 “커피, 당근, 쌀도 비슷한 위험에 놓였다. 우리는 대부분의 음식을 10∼12개의 식물종에 의존하고 있다. 현대 종들은 기후변화에 취약할 수 있어 미래 교배를 위한 야생종 종자의 다양성 확보는 매우 중요하다”라고 <가디언>에 말했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