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대승을 거둔 지난해 총선 당일 풍경. 민주당 이해찬 상임공동선대위원장이 지난해 4월15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 마련된 당 선거상황실에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종합상황판에 당선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공동상임선대위원장, 이인영 원내대표, 더불어시민당 우희종, 이종걸 공동상임선대위원장. 공동취재사진
게리 리네커는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득점왕이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4강전에서 서독에 패한 뒤 유명한 말을 남겼다.
“축구는 단순한 게임이다. 90분 동안 22명이 공을 쫓는데 결국 항상 독일이 이긴다.”
실력이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승률이 높은 독일 축구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가 담긴 발언이었다.
2020년 4월15일 21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여러 면에서 여당이 불리했다. 그런데도 여당이 무려 180석을 얻었다. 전국선거에서 4연승한 것이다. 민주당 승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도 정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야당 인사가 이런 푸념을 했다.
“선거는 단순한 게임이다. 몇 달 동안 모든 정당이 인적 자원을 총동원해 열심히 뛰지만 결국 항상 민주당이 이긴다.”
21대 총선이 끝나고 3개월 뒤 더불어민주당 자체 총선 평가 토론회가 열렸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정해구 전 교수가 발제에서 이런 분석을 했다.
“19~21대 총선을 통해 20~40세대의 선거 참여가 크게 증가했고 그들은 민주당 계열 정당을 집중적으로 지지했다. 미래통합당 계열 정당은 영남 유권자와 주로 50대 이상 지지에 의존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진성준 전략기획위원장은 “2016년 말부터 시작된 ‘촛불 시민혁명의 압도적인 시대 규정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의 분석은 ‘유권자 지형’이 세대를 중심으로 민주당 우위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분간 선거에서 민주당이 질 수 없다는 의미였다.
반면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코로나19가 없었다면 선거 결과가 달랐을 것으로 본다”며 “민주당의 승리 추세는 언제든 우연처럼 끝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민주당은 올해 초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4·7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은 이길 수 있다고 봤다. 근거는 역시 ‘유권자 지형’의 근본적 변화였다. 20~40대 유권자들이 더불어민주당이 아니라 국민의힘을 찍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상찮은 2030…대선 앞 요동친 ‘유권자 지형’
엘에이치 사태로 민심이 급속히 악화하자 민주당도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슴속 깊이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서울시장을 내주더라도 내년 3월 대선은 이길 수 있다는 낙관론이었다.
낙관론의 근거는 1987년 이후 대선 법칙이었던 ‘10년 주기설’과, 변변한 대선주자가 없는 ‘허약한 야당’이었다. 민주당 의원 중에는 “우리가 정신을 차리려면 서울시장 선거에서 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민주당은 1955년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해 창당한 민주당을 자신들의 뿌리로 본다. 그런데 4·7 서울시장 선거는 1955년 민주당 창당 이후 치러진 서울의 모든 선거 중에서 가장 크게 패배한 선거였음이 드러났다.
내용은 더 심각했다. 방송사 출구 조사 결과 18살부터 29살까지 유권자의 55.3%가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를, 34.1%가 박영선 민주당 후보를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30대 유권자들도 56.5%가 오세훈 후보를, 38.7%가 박영선 후보를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상할 수 없었던 20~30대 유권자들의 ‘반란’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민주당 사람들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4·7 서울시장 선거 뒤에는 2022년 3월 대선 필승론이나 10년 주기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현저히 줄었다.
국민의힘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 주호영 의원과 나경원 전 원내대표가 출마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민주당 사람들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야당 복이 좀 남은 것 같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착각이었다.
티케이(TK: 대구·경북)를 중심으로 국민의힘 열성 지지층의 ‘전략적 선택’이 가세하며 이준석 돌풍은 태풍으로 발전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가까워지면서 온도가 자꾸 올라갔다. 민주당 사람들의 표정은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21대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의 암울한 모습.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와 원유철 미래한국당 대표 등 양당 선대위 관계자들이 2020년 4월15일 오후 국회도서관 강당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서 굳은 표정으로 개표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결국 민주당의 악몽은 6월11일 현실이 됐다. 이준석 대표의 등장은 20~30대 유권자들의 오세훈 시장 지지가 일시적 현상이 아닐 수 있다는 증거다. 당장 내년 3월 정권이 넘어가게 생긴 것이다.
최근 민심은 확실히 더불어민주당에 불리한 흐름이다. 여론조사부터 심상치 않다.
전국지표조사 6월 둘째 주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0%, 더불어민주당 27%, 국민의당 5%, 정의당 4%, 태도 유보 29%였다. 조사를 시작한 지난해 7월 이후 국민의힘이 민주당을 앞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6월7~9일 전국 1010명 대상. 95% 신뢰수준에서 ±3.1%p.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본래 국민의힘 지지도가 높았던 다른 여론조사기관 조사에서는 국민의힘이 오차범위를 벗어나 앞서가기 시작했다.
대선 후보 적합도 조사도 마찬가지다. 전국지표조사는 4월 첫째 주 이후 줄곧 이재명 경기지사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앞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24%로 동률을 이뤘다. 윤석열 전 총장이 본래 앞서 있었던 다른 조사에서는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이준석 돌풍의 효과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다.
반성문 쓰는 민주당…“2030 절망한 이유 직시해야”
민주당이 어떻게 해야 할까? 86세대인 3선 이원욱 의원이 15일 통렬한 반성문을 썼다.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 한다. 맘 떠난 국민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에게 기꺼이 주었던 지지를 다시 불러와야 한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기 성찰과 반성이다. 86세대는 민주당의 주류 아닌가. 주류인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 성찰과 더불어 민주당의 벗이었던 2030이 떠난 이유를 직시해야 한다. 해답은 거기에 있다. 청년의 절망. 청년들은 4차 산업혁명의 파고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절망한다. 청년의 좌절. 영끌이라도 해서 잡아보려 했던 내 집 마련의 꿈을 막아버리는 민주당 부동산 정책의 실패와 냉혹함에 고개를 돌린다. 여전히 계속되는 50만 공시생이 증명하지 않는가. 과거청산이 아닌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정책을 만들자. 배틀식 승자독식의 구조를 깨고 약자도 함께 가는 나라에 대한 비전을 세우자.”
하긴 이준석 대표는 생물학적 청년이지 가치와 철학이 젊은지는 의문이다. 약육강식 정글 자본주의, 여성·청년 할당제 폐지, 흡수통일론 같은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20~30대 유권자들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과거 대선에서 20~30대 유권자들이 김대중·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것은 후보의 나이가 젊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와 노선과 정책이 젊기 때문이었다.
이준석 대표 등장이 내년 3월 대선에 최종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다. 각 당 대선 후보 경선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대선은 결국 대표가 아니라 후보가 치르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유권자 지형이 전보다 훨씬 더 평평해졌다는 사실뿐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은 한국에 2 대 0으로 패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게리 리네커는 이렇게 말했다.
“축구는 단순한 게임이다. 90분 동안 22명이 공을 쫓는데 결국에는 독일이 더는 늘 이기지는 않는다. 예전 버전은 역사로 봉인됐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