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토요판] 박성민의 2017 오디세이아 (6) 지도자란 무엇인가
이끌어라, 못하겠으면 떠나라
‘싱가포르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콴유가 3월23일 별세했다.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이 ‘독립의 아버지’, ‘건국의 아버지’, ‘산업화의 아버지’, ‘민주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칭송을 받았지만 리콴유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나라 자체를 상징했다. 리콴유가 싱가포르였고 싱가포르가 리콴유였다. ‘민족’의 독일과 비교해 ‘개인’의 프랑스로 불릴 정도로 인물에 대한 자부심이 큰 프랑스조차 그런 영광을 누린 사람은 없었다. 알제리 독립 전쟁에 자금을 지원한 사르트르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잖은가? 놔둬라. 그도 프랑스다”라고 했던 사람은 ‘또 하나의 프랑스’ 드골이었다. 철학자 베르나르앙리 레비도 사르트르를 또 한명의 드골이라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볼테르도 프랑스고, 드골도 프랑스고, 사르트르도 프랑스라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인물들이고 멋진 말들인가. 그렇다. 분명히 그들은 프랑스를 상징한다. 그런 그들조차 싱가포르의 리콴유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 나라를 상징하는 ‘인물’을 통해 한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갖는다. 물론 역사, 영토, 경제, 종교, 문화, 기업, 제품, 음식, 스포츠, 군사력, 제도, 철학, 예술, 교육, 인종, 민족 등도 한 국가의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강하게 끼치지만 사람들은 역시 사람을 통해 한 나라를 받아들인다. 정치가, 작가, 가수, 배우, 스포츠 스타, 감독, 기업인과 같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그들의 나라를 들여다보는 창이고 들어오는 문이다. 외국인들은 ‘삼성’이라는 창을 통해 한국을 보고 ‘싸이’라는 문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괴테, 셰익스피어, 카뮈 같은 작가들은 조국에 ‘위대한’ 이미지를 선물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작가와 예술인들이 조국의 이미지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해도 위대한 나라는 역시 위대한 지도자가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 없이 위대한 나라가 된 역사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위대한 나라는 위대한 왕, 위대한 군인, 위대한 정치가가 만들었다. 지도자의 크기가 나라의 크기다. 오늘날 아베의 크기가 일본의 크기고 푸틴의 크기가 러시아의 크기다. 시진핑의 크기가 중국의 크기고 박근혜의 크기가 대한민국의 크기다. 오바마의 크기가 미국의 크기고 메르켈의 크기가 독일의 크기다. 지도자가 위대하면 나라가 위대해진다.
‘통찰’도 ‘성찰’도 없다면 결국 ‘현찰’(?)에만…
지도자는 혼자 크지 않는다. 혼자만 컸다면 그는 지도자가 아니다. 대통령, 총리, 장관, 기업 회장, 대학 총장, 당 대표, 국회의원, 서울시장 등 어느 조직을 맡더라도 맡은 조직과 조직원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자기만 컸다면 그를 지도자로 부를 수는 없다. 직에만 관심이 있고 업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위대한 지도자는 자기의 성장에 걸맞게 조직을 성장시킨다. 1981년 제너럴일렉트릭(GE)의 회장에 취임한 잭 웰치는 “고쳐라, 매각하라, 아니면 폐쇄하라”는 공격적인 슬로건으로 회장에서 물러난 2001년까지 회사를 40배 성장시켰다. 2001년에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인’으로 선정했다. 더 중요한 것은 2000년에 지이 역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비판하지만 그가 1987년 삼성의 회장을 맡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역량은 인정해야 한다. 위대한 기업은 담대한 혁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혁신은 혁명보다 어려운 일이다. 위대한 지도자만이 혁신을 이끌 수 있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정치가, 기업인, 군인은 결과로 평가받는 사람들이다. 선한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통찰력, 결단력, 설득력, 추진력이 없다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실존적 선택을 해야 한다. 지도자는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결단해야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폴 사르트르는 이런 인생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인생은 B(Birth·탄생)와 D(Death·죽음) 사이의 C(Choice·선택)다.
정치 지도자 역시 결과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유력 대선주자인 김무성과 문재인은 현재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다. 만약 그들이 당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그들에게 나라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한 자치단체장들 역시 자기가 맡은 자치단체의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면 대열에서 탈락할 것이다. 민주화운동 출신의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의 실망은 자기들이 성장한 만큼 대한민국, 당, 지지자들을 성장시키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대법관 출신의 이회창이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맡았던 조직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1988년 대법관 신분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유명무실했던 선관위의 위상을 확립했다. 1989년 보궐선거에서 민정·평민·민주·공화당 등의 모든 후보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고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에게도 경고장을 보냈다. 그전의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재임 시에도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대쪽’ 이미지가 그를 대권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자신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조직의 위상도 바꿔 놓았다. 이명박 서울시장도 청계천과 교통시스템의 혁신을 통해 서울의 변화를 이끌고 대통령이 되었다.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변화를 이끄는 사람, 변화를 뒤쫓는 사람, 변화에 둔감한 사람, 그리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다. 혁신을 주도하는 사람이다. 기득권은 남의 변화를 요구하고 혁신은 자신의 변화를 요구한다. 시대에 대한 ‘통찰’도 없고,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는 사람은 결국 ‘현찰(?)’에만 관심 갖게 된다. 업보다 직에만 관심을 갖는다. 정체성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 종교인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그에 걸맞은 윤리를 갖는다. 기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져야 기자의 윤리를 지킬 수 있다. 세상 모든 직업이 다 그렇다. 정치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지도자는 자기와 가족, 그리고 측근의 일로 분노하면 안 된다. 지도자는 국민이 분노하는 일에 분노해야 한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 반대로 행동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큰 성취를 해도 그 일이 자기와 가족만을 위한 일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는 없다. 존경은 국가나 대의를 위해 희생과 헌신을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정치 지도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아베의 크기가 일본의 크기
박근혜 크기가 대한민국 크기
지도자가 위대해야 나라가 위대
위대한 지도자 없이 위대한 나라 된
역사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정치인이 싸울 대상과
앞서서 싸우지 않으면
지도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뜻 못 이루고 죽어도 지지자들은
그를 지도자로 추모하고 따른다 갈등을 오히려 조직화하는 것이 정치 본질 현재 대한민국 위기의 핵심은 지도자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전략적 방향을 이끌고 있는 컨트롤타워가 있는지 의문이다. 대통령이 ‘통찰력’이 있어야 대한민국이 어디에 서 있는지, 미래는 어떻게 오고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고, ‘결단력’이 있어야 국가의 전략 목표와 우선 추진 과제를 시기를 놓치지 않고 결정할 수 있다. ‘설득력’이 있어야 국민들에게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고, ‘추진력’이 있어야 5년의 짧은 임기 안에 성과를 낼 수 있다. 세계지도를 펴 놓고 한반도를 들여다보라. 세계 1, 2, 3위의 군사대국과 세계 1, 2, 3위의 경제대국에 둘러싸인 섬나라(!) 대한민국이 거기 있다. 바로 머리 위에는 핵과 미사일로 매일 위협하는 예측 불가의 북한도 있다. 이런 생존 조건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 사고에 능한 정치가, 외교관, 군인이 많아야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국민들이 마음 놓고 나라를 맡기고 편히 잠을 자도 될 만큼 뛰어난 전략가들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가?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왜 그리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나는 불안하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은 전략적 사고에 능한 지도자가 나오기 힘든 시대다. 지도자는 독립운동, 전쟁, 혁명, 독재를 겪으면서 실존적 각성을 통해 길러진다. 역사적 상황이 영웅을 만드는 것이다. 식민지에서 독립의 지도자가 나오고 전쟁 중에 위대한 군인도 나오는 것이고, 독재에 맞서면서 민주화의 지도자가 태어나는 것이다. 지도자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키워진다. 용기는 싸움 속에서 생긴다. 고난이 없으면 영웅도 없다. 영웅의 서사구조는 이렇다. 강하고 무서운 적이 있다. 대중은 두렵고 불안하지만 힘이 없어 저항하지 못한다. 적과 싸워줄 것으로 기대했던 우리의 대표(정치인, 경찰, 군, 검찰 등)는 무기력하거나 적과 공범이다. 대중은 영웅을 기다린다. 이때 영웅이 나타나 적을 무찌른다.(영웅의 남다른 배경도 중요하다) 대중은 영웅을 지도자로 따른다. 예컨대 박정희, 전두환의 무서운 독재가 있다. 국민은 분노하지만 두려워서 불안에 떤다. 사쿠라 야당과 어용 언론은 싸우기는커녕 적과 한통속이 된다. 국민은 새로운 지도자를 원한다. 이때 김영삼, 김대중이 등장한다. 그들은 야당을 이끌면서 국민과 함께 싸워 독재를 물리친다. 그들은 민주화의 영웅이 된다. 국민들은 그들을 지도자로 신뢰하고 지지한다. 노무현은 지역주의를 싸워야 할 적으로 상정했다. 조선일보와도 싸웠다. 그는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냈다. 뛰어난 정치인은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뛰어난 정치인은 반대를 즐기고, 위대한 정치인은 반대를 만들어낸다는 불편한 진실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감각은 탁월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종북’과 싸우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지지가 그곳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적어도) 지지자들의 분노의 지점에서 그들과 함께 싸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다. 지도자란 지지자들에게 ‘정체성’을 의심받지 않는 사람이 얻는 영예로운 호칭이다. 미국 정치학의 거장인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 정치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통찰한 바 있다. 갈등의 조직화. 그것을 이끄는 것이 정치고, 정당이고, 지도자다. 정치인에게 지도자의 이미지가 없다는 것은 그가 누구를 대변해서 누구와(혹은 무엇과) 싸우겠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기(혹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싸울 대상과 분노의 이유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내가 대변할 목소리의 주인’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지지자를 이끌고 두려움 없이 앞서서 싸우지 않는 자를 지도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고 해도 지지자들은 그를 지도자로 추모하고 따른다. 홍수환의 풀리지 않은 그 두 다리 성경의 구절을 따서 샤츠슈나이더가 변주한 대로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있는 것이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념 역시 마찬가지다. 인민을 위해 진보가 있고 보수(혹은 시장)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본질을 잊으면 화석화된 도그마에 빠진다. ‘지지자를 위해 지도자가 있는 것이지, 지도자를 위해 지지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출발은 분명 그렇다. 그러나 훗날 지지자들에게 지도자로 신뢰를 얻으면 그들은 ‘지도자를 위한 지지자’가 되기를 기꺼이 자청한다. 그때가 되면 지도자가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더라도 지지를 쉽게 철회하지 않는다. 유명한 권투선수 홍수환이 1977년 파나마에서 엑토르 카라스키야와 싸워 이긴 명승부를 기억할 것이다. 2회에 무려 네 번이나 다운을 당한 홍수환이 3회에 역전 케이오(KO) 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다리가 풀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리가 풀렸다면 역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치에서의 두 다리는 ‘리더십’과 ‘정체성’이다. 둘은 하나다. 리더십은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생기는 것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폴 발레리의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정치인들은 명심해야 한다. 김영삼이 3당 합당 했을 때, 김대중이 디제이피(DJP) 연합을 했을 때, 노무현이 정몽준과 후보단일화를 했을 때, 그리고 박근혜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를 내세웠을 때도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지 않은 것은 그들을 이미 지도자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례를 봤을 때 진보 후보든 보수 후보든 이기기 위한 가장 좋은 전략은 ‘중도에 서서(정책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와 행동을 통한 통합적 이미지), 진보(보수)의 지지를 받고(보수 정치인은 ‘안보’, 진보 후보는 ‘사회경제적’ 이슈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할 것), 보수(진보)의 의제를 뺏어오는 것이다.(보수는 진보의 의제를, 진보는 보수의 의제를)’ 거듭 말하지만 대중은 이끌지 않는(못하는) 정치인을 지도자로 선택하지 않는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1991년 설립한 ‘민(MIN) 컨설팅’ 대표. 30년간 정치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수많은 선거를 이끌었다.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리를 위한 캠페인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를 꿈꾼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힘든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다’는 인생관으로 버틴다. 책과 영화, 커피를 사랑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2017 오디세이아’를 통해 차기 대선을 향한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한다. 격주 연재.
박근혜 크기가 대한민국 크기
지도자가 위대해야 나라가 위대
위대한 지도자 없이 위대한 나라 된
역사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정치인이 싸울 대상과
앞서서 싸우지 않으면
지도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뜻 못 이루고 죽어도 지지자들은
그를 지도자로 추모하고 따른다 갈등을 오히려 조직화하는 것이 정치 본질 현재 대한민국 위기의 핵심은 지도자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전략적 방향을 이끌고 있는 컨트롤타워가 있는지 의문이다. 대통령이 ‘통찰력’이 있어야 대한민국이 어디에 서 있는지, 미래는 어떻게 오고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고, ‘결단력’이 있어야 국가의 전략 목표와 우선 추진 과제를 시기를 놓치지 않고 결정할 수 있다. ‘설득력’이 있어야 국민들에게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고, ‘추진력’이 있어야 5년의 짧은 임기 안에 성과를 낼 수 있다. 세계지도를 펴 놓고 한반도를 들여다보라. 세계 1, 2, 3위의 군사대국과 세계 1, 2, 3위의 경제대국에 둘러싸인 섬나라(!) 대한민국이 거기 있다. 바로 머리 위에는 핵과 미사일로 매일 위협하는 예측 불가의 북한도 있다. 이런 생존 조건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 사고에 능한 정치가, 외교관, 군인이 많아야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국민들이 마음 놓고 나라를 맡기고 편히 잠을 자도 될 만큼 뛰어난 전략가들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가?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왜 그리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나는 불안하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은 전략적 사고에 능한 지도자가 나오기 힘든 시대다. 지도자는 독립운동, 전쟁, 혁명, 독재를 겪으면서 실존적 각성을 통해 길러진다. 역사적 상황이 영웅을 만드는 것이다. 식민지에서 독립의 지도자가 나오고 전쟁 중에 위대한 군인도 나오는 것이고, 독재에 맞서면서 민주화의 지도자가 태어나는 것이다. 지도자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키워진다. 용기는 싸움 속에서 생긴다. 고난이 없으면 영웅도 없다. 영웅의 서사구조는 이렇다. 강하고 무서운 적이 있다. 대중은 두렵고 불안하지만 힘이 없어 저항하지 못한다. 적과 싸워줄 것으로 기대했던 우리의 대표(정치인, 경찰, 군, 검찰 등)는 무기력하거나 적과 공범이다. 대중은 영웅을 기다린다. 이때 영웅이 나타나 적을 무찌른다.(영웅의 남다른 배경도 중요하다) 대중은 영웅을 지도자로 따른다. 예컨대 박정희, 전두환의 무서운 독재가 있다. 국민은 분노하지만 두려워서 불안에 떤다. 사쿠라 야당과 어용 언론은 싸우기는커녕 적과 한통속이 된다. 국민은 새로운 지도자를 원한다. 이때 김영삼, 김대중이 등장한다. 그들은 야당을 이끌면서 국민과 함께 싸워 독재를 물리친다. 그들은 민주화의 영웅이 된다. 국민들은 그들을 지도자로 신뢰하고 지지한다. 노무현은 지역주의를 싸워야 할 적으로 상정했다. 조선일보와도 싸웠다. 그는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냈다. 뛰어난 정치인은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뛰어난 정치인은 반대를 즐기고, 위대한 정치인은 반대를 만들어낸다는 불편한 진실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감각은 탁월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종북’과 싸우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지지가 그곳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적어도) 지지자들의 분노의 지점에서 그들과 함께 싸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다. 지도자란 지지자들에게 ‘정체성’을 의심받지 않는 사람이 얻는 영예로운 호칭이다. 미국 정치학의 거장인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 정치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통찰한 바 있다. 갈등의 조직화. 그것을 이끄는 것이 정치고, 정당이고, 지도자다. 정치인에게 지도자의 이미지가 없다는 것은 그가 누구를 대변해서 누구와(혹은 무엇과) 싸우겠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기(혹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싸울 대상과 분노의 이유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내가 대변할 목소리의 주인’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지지자를 이끌고 두려움 없이 앞서서 싸우지 않는 자를 지도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고 해도 지지자들은 그를 지도자로 추모하고 따른다. 홍수환의 풀리지 않은 그 두 다리 성경의 구절을 따서 샤츠슈나이더가 변주한 대로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있는 것이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념 역시 마찬가지다. 인민을 위해 진보가 있고 보수(혹은 시장)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본질을 잊으면 화석화된 도그마에 빠진다. ‘지지자를 위해 지도자가 있는 것이지, 지도자를 위해 지지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출발은 분명 그렇다. 그러나 훗날 지지자들에게 지도자로 신뢰를 얻으면 그들은 ‘지도자를 위한 지지자’가 되기를 기꺼이 자청한다. 그때가 되면 지도자가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하더라도 지지를 쉽게 철회하지 않는다. 유명한 권투선수 홍수환이 1977년 파나마에서 엑토르 카라스키야와 싸워 이긴 명승부를 기억할 것이다. 2회에 무려 네 번이나 다운을 당한 홍수환이 3회에 역전 케이오(KO) 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다리가 풀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리가 풀렸다면 역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치에서의 두 다리는 ‘리더십’과 ‘정체성’이다. 둘은 하나다. 리더십은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생기는 것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폴 발레리의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정치인들은 명심해야 한다. 김영삼이 3당 합당 했을 때, 김대중이 디제이피(DJP) 연합을 했을 때, 노무현이 정몽준과 후보단일화를 했을 때, 그리고 박근혜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를 내세웠을 때도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지 않은 것은 그들을 이미 지도자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례를 봤을 때 진보 후보든 보수 후보든 이기기 위한 가장 좋은 전략은 ‘중도에 서서(정책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와 행동을 통한 통합적 이미지), 진보(보수)의 지지를 받고(보수 정치인은 ‘안보’, 진보 후보는 ‘사회경제적’ 이슈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할 것), 보수(진보)의 의제를 뺏어오는 것이다.(보수는 진보의 의제를, 진보는 보수의 의제를)’ 거듭 말하지만 대중은 이끌지 않는(못하는) 정치인을 지도자로 선택하지 않는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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