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상자인가? 약상자인가? 그 상자 안에 담긴 것은 달콤한 크림인가? 온갖 민원을 다스릴 만병통치약인가?
한나라당 박성범 의원 부인 신은경씨에게 21만 달러의 뇌물을 줬다고 주장한 서울시 중구청장 출마 희망자쪽이 검찰 진술에서 뇌물을 담은 용기를 ‘케이크상자’에서 ‘약상자’라고 바꿨다. 한나라당은 자체 조사에서 성낙합 전 중구청장 부인의 인척인 장아무개씨가 신은경씨에게 케이크상자에 뇌물을 담아 전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뇌물 제공자는 왜 진술을 바꿨을까? 케이크상자와 약상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동안 뇌물을 담고 운반하는 데 사용된 ‘그릇’들의 변천사를 정리해본다.
얼마 전 발간된 책 <장미와 씨날코>에는 1959년 당시 권력 2인자였던 이기붕 집에 헌납된 선물 목록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장미, 깨소금, 멧돼지 뒷다리, 병아리, 수박, 바늘쌈지, 아스파라거스, 멜론, 쌀, 은어, 새우젓, 산양, 노루, 코카콜라, 전기담요, 돈궤, 양수기, 아이스하키, 호랑이뼈… 왕조시대 왕실 진상품에 해당할 다양한 물품이 뇌물로 바쳐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추수감사철에는 칠면조 8마리가 들어왔고, 당시 최고 부자들이 즐겼다는 독일 과일음료 ‘씨날코’도 각광받는 뇌물 목록 가운데 하나였다. 생필품도 뇌물로 바쳐졌는데 구공탄 2000장, 목탄 15가마, 장작 4.5가마, 설탕 6포, 소금 13가마, 밀가루 28포대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서울 월급쟁이 한달 평균소득이 12만1902환이었었는데 구공탄 2000장 값은 이와 맞먹고, 설탕 6포와 밀가루 28포대는 각각 4만9200환, 6만3천환으로 월 평균소득의 1/3, 1/2에 달하는 큰 액수이니, 당시에 주로 통용됐던 뇌물이었던 셈이다.
한나라당 박성범 의원 부인이 공천헌금으로 받았다는 프랑스산 고급 꼬냑인 ‘루이 13세’
생필품 위주의 뇌물이 ‘루이 13세’, ‘명품가방’으로 변천
세월따라 뇌물 목록도 달라졌다. 생필품보다는 호화·사치품이 등장했다. 이 가운데 한나라당 박성범 의원이 공천희망자로부터 받은 것으로 알려진 최고급 코냑인 ‘루이 13세’와 ‘명품 핸드백’은 ‘뇌물 진화’의 현주소다.
코냑 ‘루이 13세’는 빈 병값만 10만원에 이르는 신종 뇌물이다. 프랑스 레미마르탱사가 만든 루이 13세는 오크통 숙성 기간만 50년으로 국내에서는 700mL 한 병에 300만원 정도에 팔린다. 크리스털 병의 목 부분은 14K 금도금 장식이 둘러져 있고 병과 포장 케이스 등 3군데에는 손으로 새긴 일련번호가 적혀 있다. 루이 13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대 국회 때인 1996년 8월. 당시 국민회의 한 의원이 유럽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1200달러 상당의 세계 최고급 양주인 루이13세 2병을 구입한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와 비판이 쏟아졌고, 1997년 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미국 방문 때 루이 13세를 접대받은 사실도 이 술의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켰다.
사진은 한나라당 박성범 의원 부인이 공천헌금으로 받았다는 구치백의 한 종류.
‘명품 핸드백’도 새로이 등장한 뇌물이다. 지난해 1월 <문화방송> ‘신강균의 사실은’ 취재기자의 ‘구치백’ 양심선언은 명품 핸드백이 뇌물로 보편화됐음을 알려준 계기가 됐다.
상품보다는 현찰이 선호되는 추세
그래도 뇌물은 여전히 현찰이 ‘으뜸’이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수표 대신 1만원권짜리 현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때부터 뇌물 전달자들은 수억원대의 현금을 의심없이 전달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는데, 처음 각광받은 것이 사과상자와 라면상자다.
사과상자에는 1만원으로 가득 채울 경우 최대 4억원(보편적으로는 2억)이 들어가는데다 특별하게 남들의 주의를 끌만큼 튀지 않고 운반도 쉬운 이점이 있다. 1997년 수서비리 사건 당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사과 상자(2억4000만원)와 라면 상자(1억2000 만원)로 100억여원의 뇌물을 뿌렸다. 신광식·우찬목 두 시중은행장은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으로부터 돈이 든 사과상자 두 개씩 받아 구속됐고, 대출비리 사건으로 구속됐던 손홍균 전 서울은행장도 사과상자 1개를 받았다.
정치비자금 비리에도 사과상자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은 SK에서로부터 100억원의 정치비자금을 사과상자를 통해 받았다. 뇌물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96년 당시 신한국당 김석원 의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사과상자 25개(61억원)에 담아 쌍용양회 경리창고에 보관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사과상자·골프가방에서 안동간고등어·상주곶감 등 특산물상자도
하지만 ‘사과상자’도 뇌물 전달 용기로 낙인 찍히면서 그 명성을 잃어갔다. 이후 여행용 가방(4억~5억)과 골프 가방(1억~3억), 007가방, 복사용지 박스 등 뇌물을 담는 그릇은 진화를 거듭했다. 99년 국세청 대선자금 불법모금에는 여행용 가방(5억원)과 이불 보자기가 동원됐다. 2001년 ‘진승현 게이트’ 때 특급호텔 주차장에서 승용차 트렁크에 뇌물을 담은 골프가방을 옮겨 싣는 수법이 선보였다. 5천만원 미만의 뇌물에는 공개된 장소에서 쉽게 주고받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007가방(1억원)과 케이크·양주 상자, 복사용지 박스 등도 광범위하게 통용됐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공사 수주 대가로 사업가로부터 2001년 4천만원을 복사용지박스와 가정용 가방에 받았다는 증언으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굴비상자’는 2003년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구속 중인 양윤재 서울시 행정제2부시장은 청계천 복원사업추진본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3년 12월에서 지난해 2월경 사이에 부동산개발업체 대표 길아무개씨에게서 고도제한 완화 등 사업 편의 제공 청탁과 함께 굴비세트 선물가방에 담긴 1억원을 포함해 총 2억1000여만원을 받았다.
안상수 인천시장은 여동생이 지난 2004년 건설업체 대표로부터 현금 2억원이 들어있는 굴비상자를 대신 받은 것으로 드러나 화제가 됐다. 개그맨 ㅅ아무개씨의 경우 007 가방에 뇌물 3천만원을 넣어 방송국 피디들에게 돌렸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뇌물 제공이 잘못된 증언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최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지난해 6월에는 한국마사회 비리사건에선 안동 간고등어와 상주 곶감 등 지역 특산물 상자를 활용한 기상천외한 뇌물용기가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윤영호 전 마사회장과 후임인 박창정 전 회장 등은 뇌물을 받을 때, 3000만원은 안동간고등어상자, 2000만원은 곶감상자, 300만원은 초밥통을 이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한편, 지난 2002년 대선 당시엔 고속도로 휴게소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사과상자가 실려 있는 트럭째 뇌물로 넘기는 ‘차떼기' 수법이 새롭게 등장해 국민들을 경악케 하기도 했다.
뇌물수수엔 가벼운 달러를 사용하세요? 사진은 원화 1억원과 100달러 지폐 1000장(1억2천여만원)을 비교해서 모은 모습. 김진수 기자
뇌물 전달 상자뿐 아니라 현금도 1만원권에서 ‘달러’로 변화
김대중 정권 들어서는 부피를 줄이기 위한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사건에서 양도성 예금증서(CD)가 등장했고, 2002년 나라종금 사건 때는 100달러짜리 미화가 오갔다.
당시 이용근(62)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두번에 걸쳐 100달러짜리 지폐 150장, 1만5천달러를 받았다. 김홍일 의원의 최측근 정학모(61·전 LG스포츠 고문)씨도 나라종금 등에서 8번에 걸쳐 6만5천달러를 받았다. 2003 5월 수뢰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손영래 전 국세청장도 수뢰액 가운데 1200만원을 100달러 지폐 100장으로 받았다.
이후 1만원권 지폐 대신 100달러짜리 지폐가 주로 쓰이는 추세다. 부피와 무게뿐 아니라 환전과 활용도 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100달러는 1만원권에 비해 같은 뇌물액수라도 부피는 10분의 1에 불과하다. 1만원권을 기준으로 1억원은 약 7kg이다. 사과상자에 4억을 담을 경우 30kg에 육박해 ‘들어만 보면’ 뇌물 여부를 누구나 쉽게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100달러짜리 100장을 1묶음으로 하면 20만달러(약 2억원)도 20다발밖에 안되고, 무게도 2kg 남짓이어서 뇌물 판별이 쉽지 않다.
일례로 박성범 의원 부인이 받은 21만달러를 1만원권 지폐로 받을 경우 2만1000장(210다발)을 담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고 무게도 15kg에 달해 운반과 보관이 쉽지 않다. 하지만, 100달러 지폐로는 2100장(200다발 남짓)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사과상자를 이용하지 않아도 부피가 작은 케이크상자나 약상자에 넣어 배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의심의 눈총도 피할 수 있다. 달러화의 매력은 또한 환전이 쉽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원화로 바꿔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으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 선호하는 추세다.
뇌물 전달방식의 진보는 뇌물을 주고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주고받으려는 속성 탓에 ‘진보’는 필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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