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19일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열린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필수의료 혁신 전략회의’에서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다음날 아침 유승민 전 의원은 한국방송(KBS) 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 인터뷰에서 선거 결과를 “윤석열 대통령의 패배”라고 했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진단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는 ‘윤석열의, 윤석열에 의한, 윤석열을 위한’ 선거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김태우 전 구청장이 다시 출마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김태우 전 구청장이 당선됐다면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에 의한 위대한 승리’로 정치사에 기록됐을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아쉽겠지만 이번 선거로 대한민국에 아직 상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습니다. 이제 선거 결과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느냐의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교훈을 얻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역시 윤 대통령입니다. 윤 대통령은 선거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요? 선거 직후부터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 사람들의 발언을 면밀하게 추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거 다음날인 10월12일 대통령실은 “정부는 어떠한 선거 결과든지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내놓았습니다. 10월13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를 추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차분’에 방점이 찍혔다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일요일인 10월15일 대통령실 관계자는 “민생 경제를 중시하는 기조로 대책을 준비 중”이라며 “당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 당과 변화를 위한 조짐이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뭔가 큰 폭의 방향 전환을 하고 있다는 예고였습니다.
10월16일 윤 대통령은 용산 분수정원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열고 “국민 소통, 현장 소통, 당정 소통을 더 강화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분수정원은 실외였습니다. 대통령과 참모들이 사무실에서 밖으로 나와 회의를 한 것 자체가 외부와 소통하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참모들과 국민의힘에 선거 패배의 책임을 떠미는 듯한 태도였습니다.
10월17일 저녁에는 청와대 영빈관에서 국민통합위원회 민간위원·정부위원, 국민의힘 당 4역(당대표,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과 국회 상임위원장 및 간사, 대통령실 비서실장 및 수석비서관 등 90여명과
대규모 만찬을 했습니다. 대통령실에서 자료를 밤늦게 내는 바람에 언론에서 자세히 보도하지 않았지만,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국민 통합이라는 것이 어떤 가치를 기제로 해서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물론 우리의 가치 기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헌법이라고 하는 규범이고 거기에 깔려 있는 어떤 자유와 연대 정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 많은 서민들, 청년들은 또 여러 가지 경제와 이런 어려운 가계 부채라든가 이런 문제로 아주 정말 힘듭니다.”
“자유와 이 연대라고 하는 것은 우리 어느 나라가 적으로부터 불법적인 침략을 받았을 때 그 나라 혼자서 지키지 않지 않습니까? 많은 나라들이 가서 도와줘서 그 나라의 주권과 그 나라 국민의 자유를 지켜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삶이 어려울 때 국가에서 또 좀 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그 어려움을 함께 도와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이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저는 그것이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연대라는 것은 이건 국가주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야말로 연대 없는 자유 없고 또 자유 없는 연대는 공허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우리가 연대를 해야 되고 그 바로 연대의 가치를 잘 찾아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뭔지를 잘 찾아내는 것이 그동안 국민통합위의 일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앞으로 정말 그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분들을 도대체 어떻게 도와드려야 되는지, 우리의 헌법 가치가 거기에 어떻게 적용돼야 되는 것인지를 찾아야만 우리의 헌법 가치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정말 국민들이 우리 헌법을 사랑하고 아끼고 이것만이 나를 지켜줄 가치라는 것에 다 공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통합위원회의 활동과 정책 제언들은 저한테도 많은 어떤 통찰을 줬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이 정책 집행으로 이어졌는지는 저와 우리 내각에서 좀 많이 돌이켜보고 반성도 좀 많이 하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월17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민통합위원회 만찬에서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의 건배 제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 특유의 장황하고 중언부언하는 말투로 ‘자유와 연대’를 서민과 청년 지원 정책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좀 억지스럽지만, 어쨌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서 국민 통합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념에서 민생으로 선회하겠다는 신호입니다.
특히 ‘저와 우리 내각’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0월18일에는 한발 더 나갔습니다. 참모들에게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떠한 비판에도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민생 현장으로 더 들어가서 챙겨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발언의 배경을 묻는 기자들에게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정치에서 ‘민심은 천심이다’ ‘국민은 왕이다’라고 늘 새기고 받드는 지점이 있다.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윤 대통령의 말은 민심을 살피며 정치를 오랫동안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임 대통령과 야당을 ‘이권 카르텔’ ‘공산 전체주의’라고 공격하고 국민을 갈라쳐온 윤석열 대통령의 말과 인식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월19일에도 윤 대통령은 “지금 어려운 국민과 좌절하는 청년이 많으므로 국민들의 삶을 더 세심하게 살피고 챙겨야 한다. 나도 어려운 국민들의 민생 현장을 더 파고들겠다. 용산의 비서실장부터 수석, 비서관 그리고 행정관까지 모든 참모들도 책상에만 앉아 있지 말고 국민들의 민생 현장에 파고들어 살아 있는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으라”고 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충북대에서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필수의료 혁신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국립대병원을 필수의료 체계의 중추로 육성해 지역 의료 붕괴를 막아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민생 경제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정책 의제를 꺼내 든 것입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이럴 때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빗대서 ‘우리 윤 대통령이 달라졌어요’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말만 하지 행동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통령의 말은 국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뭘까요? 동아일보 10월19일치 6면 기사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윤 대통령은 보선 참패 후 최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참모들이 ‘민생을 잘하기 위해 이념을 꺼낸 것인데, 이념은 충분히 부각됐으니 이제 민생에 집중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이 기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의 최근 통합과 민생 치중 행보의 배경을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은 본래 이념과는 별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정권과 싸우고 대선에 출마하면서 보수-극우 이념을 갖게 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윤 대통령에게 태도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60살이 넘은 사람에게 태도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윤 대통령은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말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선의 변화는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념에 대해 깊은 철학적 배경이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이 선거 패배를 계기로 보수·극우 노선에서 민생·실용 노선으로 변화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민생·실용 노선은 윤 대통령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이른바 보수 세력 전체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입니다.
앞으로 남은 문제는 ‘굳히기’입니다. 윤 대통령이 민생·실용 노선을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일입니다. 최근 윤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언론에서 주문하는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인사입니다. 앞으로는 극우 인사를 기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탈이념 통합형 인재를 발탁해야 합니다.
둘째, 정책입니다. 전임 정부는 머리에서 지우고 민생 경제 의제를 계속 발굴해서 추진해야 합니다.
셋째, 소통입니다. 이재명 대표를 야당의 대표로 인정하고 만나서 대화해야 합니다. 기자 회견이나 간담회를 재개해야 합니다.
윤 대통령이 잘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