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5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5일 화제가 된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스포트라이트가 비친 곳은 연단이 아니었습니다. 김성태 원내대표가 마이크를 잡자, 뒤편 문희상 국회의장이 근엄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본회의장 양쪽 벽면에 있는 화면에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Moonwalk)’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김 원내대표는 검은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마이클 잭슨의 신들린 ‘문워크’ 사이에 꼿꼿이 서서 “마이클 잭슨의 문워킹에는 박수와 환호, 갈채가 쏟아지지만, 문재인 정권의 경제 헛발질 문워킹에는 탄식과 절규가 넘쳐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평소라면 정색했을 여당 의원들조차 ‘피식’ 웃었습니다. ‘적폐청산쇼’를 펼치고 있는 문재인 정권도 로마처럼 쇠퇴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할 때는 화면에서 호랑이가 그려진 사료 사진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연설의 클라이맥스는 사전 배포 원고에 없던 문희상 국회의장을 향한 “청와대 스피커” 비판이 등장했을 때였습니다. 여야 의원 간 서로를 성토하는 고함 속에 연설의 막이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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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급하다” “저잣거리 거친 언사” 비판 낳은 김성태 연설
김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은 곧바로 논란에 휘말렸습니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글을 올려 “눈을 의심했다. 오랜 세월 정치를 해왔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단연코 처음”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김성태 원내대표의 연설이 “소득주도 성장은 보이스피싱” “세금 뺑소니” “문재인 정권이 몽니를 부리고 있다” “나라 경제를 끝판으로 내모는 ‘소득주도성장 굿판’을 멈춰라” “국민이 바보냐” “통계청에도 탁현민이 필요했느냐” 등 직설적인 화법으로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데 채워졌던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정 전 국회의장은 “신성한 의사당에서 행해지는 교섭단체 대표 연설인지 아니면 저잣거리에서 토해내는 울분에 찬 성토인지 무척 혼란스러웠다”면서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대중적인 언어와 저잣거리의 거친 언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김 원내대표를 비판했습니다. “반대중독에 걸린 야당의 행태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 대본이라 해도 손색 없을 정도”(박경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 “재미는 있었을지 모르나 감동이나 품격도 없고 현실적 대안도 부족했다”(김수민 바른미래당 대변인)는 각 당의 논평도 나왔습니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마이클 잭슨도 역주행하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스텝을 밟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소득주도성장론은 김성태 류의 ‘막말주도정치’의 벨트 위에서 스텝을 밟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김 원내대표는 연설을 마치고 나와 기자들과 만나 “밋밋한 야당보다는, 반응이 핫(Hot)한 것이 좋은 것”이라며 이런 반응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5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교섭단체 대표 연설이 뭐길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은 정기 국회가 개원하기 전 그 정당의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연설입니다. 무려 40분간 공개적으로 전 국민과 의원들 앞에서 당이 추진하는 방향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사회적 화두를 던진다는 상징성 때문에 당 대표나 원내대표, 혹은 최고위원 등 중량감 있는 다선 의원들이 역할을 맡습니다. 그것도 20인 이상 의석을 확보해 국회 ‘교섭단체’ 자격을 지닌 정당의 대표만이 가능합니다. 반면 현재 비교섭단체인 정의당의 경우엔 교섭단체 대표 연설 대신 15분간의 발언 기회만 주어집니다.
교섭 정당의 당 대표와 원내대표는 번갈아가며 교섭단체 연설에 임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민주당의 경우 홍영표 원내대표, 이해찬 대표 모두 이번 정기국회가 첫 연설 무대가 될 수 있었지만 홍 원내대표의 고사로 이해찬 대표가 연단에 올랐습니다. 원내대표실 관계자는 “당대표, 원내대표 순번을 정해 돌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무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일이 많다”면서 “이번에는 이해찬 신임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맞다고 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김성태 원내대표의 연설은 20대 국회 들어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지난 2월 임시국회 개원 때도 김성태 원내대표가 연단에 올랐습니다. 김병준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은 원외이기 때문에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할 수 없습니다. 국회법 104조 2항에 따르면 “교섭단체를 가진 정당을 대표하는 의원이나 교섭단체의 대표 의원이 정당 또는 교섭단체를 대표하여” “매년 첫번째 임시회와 정기회에서 각 1회” 하도록 돼 있습니다. 만약 비상대책위원장이 현역 의원이라면 교섭단체 대표 연설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원외였던 홍준표 전 대표도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한 적이 없습니다. 바른미래당에서도 원외인 손학규 바른미래당 신임 대표가 아니라, 김관영 원내대표가 김성태 원내대표에 이어 제3정당 교섭단체 대표로서 연설에 나섭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5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정기국회 방향까지 ‘가늠자’
반드시 당 대표나 원내대표만 연설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표급 의원이 나서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래서 2017년 2월 안철수 전 의원이 국민의당을 대표해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 나섰을 때도 논란이 일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은 “국민들 앞에 밝히며 동의를 구하고 설득하는 과정인데 당연히 원내사령탑인 원내대표(주승용)가 나서든가 당 대표(박지원)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라며 “교섭단체 대표연설이라는 의정활동을 대권경쟁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국회의 위상을 심각히 추락시켰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날 연설을 앞두고, 자유한국당 안에서는 ‘김성태 원내대표가 두번째 연설 기회인 만큼, 당 내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비대위 소속의 청년이나 여성 등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의원이 당의 대표로서 청년일자리 정책이나 저출산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연설을 내놓는다면 국회에도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원내대표를 내세워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 폐기에 힘을 싣자는 방향으로 결국 결론이 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당의 중점 정책을 부각하는 중요한 교섭단체 연설이 끝나면, 각 당이 서로를 어느 지점에서 비판하고, 찬성하느냐에 따라 그 해 정기국회의 정책 방향까지 가늠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김성태 원내대표가 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해 비정규직·영세사업장 차별 없는 ‘빨간날’을 돌려줘야 한다고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발언한 뒤, 52시간 근로시간단축을 둘러싼 여야 협상 과정에서 좀 더 탄력을 받은 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의 합당이 목전이었던 지난해 가을 정기국회 때는, 국민의당 김동철 당시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속 시원하고 공감된다”고 바른정당이 칭찬하고, 다음날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 때는 국민의당이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맞받으며 ‘같은 코드’를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두 정당은 반년 뒤 바른미래당으로 합당했습니다.
한편, 본회의장에서 치러지지 못한 교섭단체대표연설도 있습니다. 2017년 자유한국당이 국회를 보이콧 하면서 결국 본회의는 산회되자, 정우택 자유한국당 당시 원내대표는 이후 열린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준비해 뒀던 교섭단체연설을 낭독했습니다. 그만큼 본회의를 보이콧하더라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40분간의 ‘대국민 PR’ 기회로 여겨집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5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김성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듣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파격적’ 김 원내대표 연설 논란, 가라앉을까
김 원내대표의 연설은 내용과 형식 어떤 면에서든 ‘파격적’이라는 평입니다. 이날 본회의를 보고 나온 한 국회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때 본회의장에 PPT를 띄웠던 것도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는데 (문워킹 영상까지 등장한) 김 원내대표의 연설은 그보다 더 충격적”이라면서도 “김성태 원내대표의 연설이니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고 평했습니다. 김 원내대표는 지난 2월 교섭단체대표연설을 할 때도 문재인 대통령의 생일파티 축하 광고 사진을 화면에 띄운 채 “연말 광고대상 감”이라고 비꼬아 여당 의원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은 바 있습니다. 김 원내대표가 정책 대안으로 제시한 단어 사용에서도 ‘섬세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 원내대표는 이날 연설에서 저출산 문제를 국정 최우선 과제로 지목하며 아이를 낳은 가구에 출산수당 2000만원을 포함해 총 1억원의 지원금을 주겠다는 “출산주도 성장”을 소득주도성장의 대안으로 제시했는데요, 저출산 지원책의 하나도 아니고 ‘출산주도 성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면서 본격적인 논란이 일었습니다. (
▶관련기사 보기: 김성태 ‘출산주도성장’에 비판 쏟아져 ) 일부 누리꾼들은 “수출주도 성장·소득주도 성장에 이은 출산주도 성장이냐. 여성이 애 낳는 기계냐” 등의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정치권과 여성계에서 관련된 비판이 속속 이어지고 있어, 이번 연설을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도 길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