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부에서 하는 개헌 방향이 좌파 사회주의 체제로 근본틀을 만드는 그런 개헌 방향으로 가고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3일, 새해 인사를 위해 김종필 전 총리의 서울 중구 신당동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의 외부 자문위원단이 만든 헌법 개정안 초안을 “사회주의 개헌”이라며 비난한 것이다. 김 전 총리는 “누가 주도하는지 몰라도 지금 세상에서 좌경화는 전부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한민국을 책임지겠다는 것인가”라며 홍 대표의 주장을 거들었다. 이날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도 따로 보도자료를 내어 “개헌 자문위가 이념적으로 편향되고 사상적으로 경도된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논란 끝에 여야 합의로 6개월 연장 합의한 개헌특위는 특위위원인 현역 의원 36명(더불어민주당 15명, 자유한국당 14명, 국민의당 5명, 바른정당 1명, 정의당 1명)과 외부 자문위원 49명이 참여해 지난 1년간 운영됐다. 외부 자문위원의 경우 김원기·김형오 전 국회의장, 김선욱 전 이화여대 총장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기본권, 경제·재정, 지방분권을 담당한 1소위(22명), 정부 형태, 정당·선거, 사법부를 맡은 2소위(24명)로 구성됐다. 교수와 법조인 등이 주축인 외부 자문위원단의 논의 내용은 말 그대로 자문에 응하는 것일 뿐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 그런데도 보수야당이 일제히 “문재인 정권의 사회주의 개헌 추진“이라며 들고일어선 데는 <조선일보>가 연일 개헌 논의에 ‘색깔론 물타기’ 보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2일과 3일, 개헌특위 자문위원단이 내놓은 헌법 개정안 초안을 대서특필했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자문위의 개헌안’이라며 자문위원단의 개헌안을 조목조목 뜯어낸 기사에는 ‘헌법도 좌향좌’, ‘국가 개입 강조한 사회주의적 개헌안’, ‘사실상 체제 전환 오해할 소지’, ‘노조 천국’, ‘사회주의 경제 하자는 얘기’, ‘야당이 넋 놓은 사이 좌편향 개헌안 밀어붙일 태세’ 등의 제목이 붙었다.
3일에는 ‘개헌 자문위의 무리수…헌재 합헌 결정 뒤집기 시도’라며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한 사형제(1996년과 2010년)와 양심적 병역거부(2011년)를 각각 폐지·인정하는 내용을 헌법에 담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헌재 결정과 정반대되는 내용을 상위법인 헌법에 담겠다는 것 자체가 위헌적 발상’이라는 주장을 폈다.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예상되는 주제이긴 하지만, 조선일보 주장대로라면 헌법 해석 기관이 헌법보다 위에 있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헌재 역시 시대 변화를 수용해 과거 자신들이 내린 합헌 결정을 위헌이나 헌법불합치로 바꾸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런 사회적 변화에 개헌 방향을 맞추는 것은 개헌 논의의 상식인데, 이를 마치 좌편향 개헌안인 것처럼 몰아간 것이다.
조선일보는 자유한국당 지도부의 반응을 따서 큼지막한 기사도 만들었다. ‘野(야) 머리에 징 맞는 느낌’이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가 이런 사회주의 개헌을 추진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식이다. 사실일까? 전혀 아니다.
일단 ‘본지가 단독 입수’했다며 마치 이념적으로 편향된 외부 자문위원단이 비공개로 개헌안을 추진한 것처럼 읽히게 만든 것부터가 사실 왜곡이다. 조선일보가 “사회주의 개헌”으로 몰아간 자문위원단의 기본권 관련 개헌안은 이미 두 달 전인 지난해 11월9일 개헌특위 누리집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주요 내용이 모두 등록돼 있다.(
n-opinion.kr/?page_id=126&uid=83&mod=document&pageid=1) 누구나 내려받아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누리집에 두 달 전인 지난해 11월9일 올라온 외부 자문위원단의 헌법 개정안 보고서.
자유한국당이 뒤통수 맞을 일은 더욱 없었다. 지난해 개헌특위 위원장은 자유한국당 이주영 의원이 맡았다. 지난해 11~12월 자유한국당을 포함한 여야 개헌특위 위원들은 개헌특위 종료 시한을 앞두고 외부 자문위원단 개헌안 등을 두고 6차례 집중토론을 진행했다.
지난해 11월22일 첫 집중토론 전체회의에서는 외부 자문위원단의 기본권·총강 분과 간사인 신필균 헌법개정여성연대 대표가 직접 기본권 개헌 방향 논의 결과를 보고했다. 조선일보는 “헌법 전문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용어를 뺐다. 제4조 통일 정책의 전제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꿨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를 대폭 약화시켰다”고 주장했는데, 신필균 대표는 전체회의에서 “(헌법 전문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절을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사회의 실현’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모았다. 통일 정책 조항에서는 헌법 전문 수정 내용과 일치시키기 위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을 ‘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으로 수정하자는 의견이 있다”고 보고했다. 특히 이날 전체회의가 있기 20일 전에 외부 자문위원단이 작성한 자문보고서에는 자문위원단이 작성한 헌법 전문 개정안은 물론, 자문위원단 논의 과정에서 나온 소수의견 등이 빠짐없이 정리돼 있다.
조선일보는 ‘기본권 제한사유 중 국가안전보장 삭제…국보법 힘 못쓴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사문화된다”는 익명의 대검 공안부장 출신 변호사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여권의 의중을 담은 것 아니냐”는 해석을 담았다. 현행 헌법 제37조2항은 국민의 기본권 제한 사유로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들고 있는데, 외부 자문위원단이 불순한 의도로 ‘국가안전보장’을 삭제하려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 내용도 지난해 11월22일 전체회의에 보고됐다. 당시 신필균 대표는 “국가안전보장은 질서유지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개인에 국가를 우선시키는 사고의 확산과 (국가안전보장 조항의) 남용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삭제하는 것을 강조드린다”고 설명했다. 11월22일 1차 집중토론 전체회의에는 자유한국당 이주영 위원장을 포함해 김성태(비례대표), 김정훈, 성일종, 정용기, 최교일, 홍일표 의원이 참석했다. 이주영·홍일표 의원은 판사 출신이고 검사 출신인 최교일 의원은 자유한국당 법률지원단장을 맡고 있다.
조선일보가 ‘자유·시장 쪼그라들고…국가주도 사회적 경제 새로 넣고’라며 사회주의 개헌 주장의 근거로 들었던 자문위원단의 노동권·경제 관련 개헌안도 마찬가지로 모두 사전에 공개되고 개헌특위에서 보고 및 토론이 진행된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외부 자문위원단의 헌법 개정안 초안 중 ‘무기(無期) 고용, 직접 고용, 동일노동·동일임금, 정당한 이유 없는 해고금지, 노동자 사업 운영 참여 보장’ 등을 거론하며 ‘노조 천국’, ‘기업들 한국 엑소더스 불보듯’ 주장을 내놓았다. 지난해 11월23일 개헌특위 2차 집중토론 전체회의에서 외부 자문위원인 김선수 변호사는 기본권(사회권) 개헌 방향과 관련해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 원칙 △고용안정 의무, 무기고용, 직접고용 원칙 △노동조건의 노사 대등 공동결정 원칙 명시 등을 보고하며 “유엔 사회권규약, 국제노동기구 협약, 우리나라의 남녀고용평등법과 근로기준법 규정, 대법원 판례를 참조했다”고 설명했다. 여야 위원들은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 원칙을 두고 4차 산업혁명 등과 연결지어 활발한 토론을 진행했다. 이날 전체회의에는 자유한국당 이주영 위원장, 김성태(비례대표), 김정훈, 성일종, 이종구, 정용기, 정종섭, 최교일 의원이 출석했다. 정종섭 의원은 대표적인 헌법학자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누리집에 공개돼 있는 개헌특위 자문위원회의 기본권·총강 관련 헌법 개정안 보고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누리집에 공개돼 있는 개헌특위 자문위원회의 기본권 관련 헌법 개정안 내용.
앞서 지난해 10월20일 작성돼 11월 초에 공개된 외부 자문위원단 보고서는 개헌을 통한 노동권 강화 필요성의 근거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미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천명했음에도 21세기가 훨씬 지난 대한민국에서는 노동은 여전히 비용으로만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어 인권 침해는 물론이고 사회통합의 중대한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나아가 유효수요의 절대 부족으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자들의 기본권 보장 강화를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도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노동3권 보장 수준은 국제노동기준에 비추어 현저하게 열악하여 노동후진국으로 평가되고 있다. 매년 유엔과 ILO 등 국제기구로부터 노동권 탄압에 대한 지적과 개선 권고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개헌의 기회에 노동권을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제헌헌법의 ‘이익균점권’, 프랑스 헌법의 ‘노동자의 기업 경영 참가’ 등 외국 입법례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조선일보는 두 달 전에 이미 공개됐고,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참여해 토론까지 벌인, 여러 개헌 방향 중 하나를 두고 ‘단독 입수’, ‘좌편향 사회주의 개헌 추진’이라며 색깔론을 펴고 있는 셈이다. 머리에 징 맞은 적이 없는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연일 조선일보 기사를 회의석상에서 읽으며 스스로 징으로 돌진하고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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