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2008년 10월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김대중 대통령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며 100억원 짜리 양도성 예금증서(CD) 사본을 들고 질의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제가 오늘 100억짜리 CD 1장의 사본을 가지고 왔습니다. 중소기업은행이 발행한 100억원짜리 CD는 2006년 2월8일 발행이고 만기가 2006년 5월12일입니다.”
2008년 10월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임채진 검찰총장에게 100억원짜리 양도성 예금증서(CD) 사본을 들어보였다. 주 의원은 “김대중 비자금”이라며 입수경위를 설명했다. “이것을 입수하게 된 것은 2006년 2월 말에서 3월 초순이니까 만기가 살아 있을 때입니다. 저에게 이 CD를 건네준 사람은 전직 검찰 관계자입니다. 지금 다른 공직에 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검찰 출신인데 왜 검찰에서 수사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노무현 검찰에서 어떻게 이것을 수사를 할 수 있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양도성 예금증서를 입수했다는 2006년 초 “한나라당에도 보고했다”는 주 의원은 “당시 이것을 건네준 사람과 어제 저녁에 통화했다. 제가 적절한 방법으로 검찰에 안내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도 했다. 주 의원은 당시 <한겨레> 취재진에게 “2년 전 검찰 관계자가 (나에게) 제보하며 ‘디제이 비자금이 확실하다’고 했다. 만기일에 CD를 찾아간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 신원만 조사하면 관련성이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검 중앙수사부는 양도성 예금증서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관계를 수사하며 ‘검찰 출신 제보자’가 누구인지 주 의원에게 알려달라고 했지만, 주 의원은 “적절하게 안내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끝내 제보자 밝히기를 거부했다.
당시 검찰 안팎에서는 주 의원이 말한 ‘전직 검찰 관계자로, 현재는 다른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 박주원 안산시장(현 국민의당 최고위원)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검찰 수사관으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대검 중수부,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실에서 근무한 박주원 최고위원은 검찰 범죄정보의 ‘전설’로 불린다. 검찰 재직 시절에는 “대검 범죄정보의 75%를 담당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이 때문에 특수통 검사들의 총애를 받았다. 검찰 재직 시절 감찰을 받을 때도 검사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대상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10월 대검 범정기획관실 사무관에서 퇴직한 뒤 검사 출신이 득세하는 정치권에서 수사관 출신으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경기 안산시장에 선출됐다. 검찰 수사관들은 그를 롤모델로 꼽기도 했다. 이 때문에 범죄정보를 다루는 검찰 후배 등과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박 최고위원이 지방선거 공천을 앞두고 이를 받아 한나라당 쪽에 전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1995년10월20일치<한겨레>신문 1면.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1995년10월19일 대정부질문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원이 입금돼 있었다고 주장하며 신한은행 서소문지점 예금조회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대검 중수부는 주 의원의 폭로 이후 수사를 진행해 2009년 2월 “양도성 예금증서의 자금원과 사용처를 추적한 결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주 의원의 무차별 폭로는 이후 명예훼손 사건으로 번졌다. 김 전 대통령 본인과 부인 이희호 여사의 고소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무려 1년10개월 만인 2010년 8월에야 주 의원을 벌금 300만원에 약식기소했고, 한 달 뒤 법원은 벌금 300만원을 확정했다. 약식기소로 끝낼 사안을 왜 그렇게 끌었냐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디제이 비자금 여부를 조사했던 대검 중수부 관계자는 8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중수부에서 조사할 때는 제보자를 밝히지는 않았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후 주 의원이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처벌을 면하기 위해 ‘내가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가 있었다’며 제보자를 검찰에 밝혔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당시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 관계자는 주 의원을 기소하기 전 제보자 신원을 밝혔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미 유죄가 확정된 사건으로 시간이 많이 지난 상황에서 더 이상 확인해 줄 것은 없다”고 했다.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2004년 2월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양도 예금증서를 들고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동문이 1300억원의 괴자금을 CD 형태로 은닉하고 있다. 당선축하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박계동 의원이 시디를 흔들어서 노태우 수사할 때처럼 수사했다”, “홍준표 의원이 시디를 흔들었을 때는 시디 번호 자체가 위조됐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검 중수부는 2009년 2월 “주성영 의원이 폭로한 양도성 예금증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이 아니다”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박계동·홍준표 의원의 사례를 거론했다.
주 의원의 무차별 폭로가 있기 정확히 13년 전인 1995년 10월1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128억원이 예치된 신한은행 서소문지점 예금조회표를 흔들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4000억원의 비자금을 시중은행 40개 계좌에 차명으로 갖고 있다”며 일부 증거를 폭로한 것이다. 이후 검찰 수사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에 5000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어 4000억원이 넘는 돈을 감춰둔 사실이 드러났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수사가 번져 2000억원 추징선고를 받았다.
박계동 의원의 폭로는 대박으로 이어졌다면, 2004년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폭로는 쪽박으로 끝났다. 당시 야당의 대표적 ‘폭로 전문가’였던 홍 대표는 2004년 2월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동문이 1300억원의 괴자금을 CD 형태로 은닉하고 있다. 당선축하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특검에 수사의뢰하겠다고 했다. 당시 홍 대표는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2003년 10월18일 하나은행 여의도중앙지점에서 발행한 액면가 100억원, 만기 4개월짜리 CD(계좌번호 358-910002-64315) 사본을 흔들었다.
홍 대표의 폭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무너지기 시작했다. 관련된 금융기관들은 “지난해에도 같은 계좌번호의 위조 CD가 발견된 적이 있다”며 홍 대표가 가지고 있는 CD가 위조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폭로 이튿날 하나은행은 “홍준표 의원이 제시한 CD 사본은 증권예탁원에 보관된 원본과 계좌번호만 같을 뿐 증서 용지, 글자체, 증서기호, 명판, 발행시간 등이 모두 다른 가짜”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에 홍 대표는 “시디를 제보받을 때 가짜일 수 있다는 전제 아래 확인했다”며 슬그머니 말을 바꾸면서도 “야당 의원이 그런 것도 제기하지 못하느냐”고 되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홍 대표는 나흘 뒤 열린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도 이미 위조로 드러난 1300억원 괴자금 의혹을 또다시 들고 나와 빈축을 샀다.
박주원 국민의당 최고위원.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주성영 의원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이라며 CD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박주원 국민의당 최고위원은, 공교롭게도 홍준표 대표가 2012년 12월 경남지사 보궐선거에 나설 때 공보지원단장을 맡았다. 2015년 5월 성완종 리스트 사건 당시 경남지사였던 홍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도지사 재보궐선거 당시 공보지원단장을 역임한 박주원 전 안산시장이 성완종 전 회장하고 통화하는데 (돈 심부름을 했다는) 윤아무개 전 경남기업 부사장을 통해 내 캠프에 큰 거 한장(1억원) 전달한 것처럼 이야기를 한 것이 있다. 그게 배달사고였다는 내용으로 장문의 진술서를 4월30일 제출했다. 검찰이 (박 전 시장을) 불러서 조사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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