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대통령의 모든 행보에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1월 초 서초동 아크로비스타에서 한남동 옛 외교부 장관 공관으로 관저를 옮긴 뒤 첫 손님은 누가 될지에 관심에 쏠린 것도 이 때문이다. 한남동 이웃인 5부요인(국회의장·대법원장·국무총리·헌법재판소장·중앙선거관리위원장), 협치 의미를 담은 야당 지도부 등이 관저 첫 손님이 될 것이란 추측이 쏟아졌다.
지난달 17일, 윤 대통령은 한남동 첫 손님으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를 맞았다. 윤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와 함께 정원을 걷고, 식탁에 앉아 환담하면서 ‘세일즈 외교’를 부각했다. 그러나 이후 드러난 손님들의 면면은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등 여당 지도부를 초청해 3시간20여분간 만찬을 했다. 이들은 한남동 관저의 공식적인 두번째 손님으로 소개됐지만, 이들보다 먼저 윤 대통령 핵심 관계자, 이른바 ‘윤핵관’으로 불리는 권성동·장제원·이철규·윤한홍 의원 부부를 관저로 초청해 만찬을 한 것이 뒤늦게 알려지며 뒷말이 나왔다.
경호를 이유로 공개를 꺼리는 윤 대통령의 관저 일정은 ‘손님들’ 입을 통해 언론에 줄줄이 공개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윤 대통령은 당권 주자로 분류되는 김기현 의원과 만났고, 주호영 원내대표와도 심야 회동을 한 사실이 각각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이달 초에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관저로 불러 만찬을 함께 했고, 김승겸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폴 러캐머라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등 한·미 군 수뇌부,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과 김삼환 명성교회 원로목사, 장종현 백석대 총장,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 스님 등 종교계 인사도 관저에 초대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대통령실은 대통령의 비공개 일정은 확인할 수 없다는 일정을 고수하고 있지만, 비공개 일정이 거듭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일을 두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과거 정부에서도 청와대 집무실이나 안가(안전가옥) 등 외부 공간에서 대통령이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비공개 회동을 해왔지만 알려지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한남동 관저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겸 총리와 회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출근길 약식회견 사라진 자리에…관저 정치에 담긴 ‘메시지’
윤 대통령의 ‘용산 시대 상징’이던 출근길 약식회견(도어스테핑)이 중단된 상황에서, 대통령이 누구와 만나 밥을 먹고 시간을 보냈는지가 공개되면서 대통령의 ‘메시지’로 풀이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예컨대 더불어민주당이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물어 사퇴를 압박하는 이상민 장관을 윤 대통령이 관저로 불렀다는 것은 이 장관에 대한 ‘재신임’ 의사로 해석됐다. 내년 2월 말 또는 3월 초 전당대회를 앞둔 여권에서 ‘한동훈 차출설’이 불거진 상황에 맞물려, 한 장관을 집으로 초대한 것은 그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대통령이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개인 공간에서 만나면서 허심탄회하게 국정을 논의한다면, 긍정적 효과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한겨레>에 “관저로 점점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책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대통령 중심으로 국정을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지금까지 드러난 관저 초청 인사들의 면면은 여당 지도부와 최측근, 차기 당권 주자 등에 머물러있다는 점은 과제로 남는다. 이들이 대통령과의 만남을 ‘자기 정치’의 밑천으로 삼으면서 계파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당권 주자 후보군 중 한명인 나경원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시비에스>(C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관저는 아직 못 갔다. 특별한 분들만 가시는 것 같다. 관저 갔다 와야지 낙점이 된다고 (한다)”라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측근에 그치고 있는 관저 정치 반경을 보면, 대통령의 새로운 ‘소통 행보’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출근길 회견 중단 이후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 시도”라며 “관저 정치를 통해 민생·협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긍정적 의미가 컸겠지만, 계파 정치를 강화하고 당을 장악해보려는 시도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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