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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단독] 북 노동당 규약서 “핵 병진노선” 빼고 ‘자력갱생 경제건설” 추가

등록 2021-06-01 19:06수정 2021-06-02 09:32

‘군사’에서 ‘경제’로 무게중심 이동
‘핵외교 운신 폭 넓히려는 시도’ 풀이
‘비핵화 의지’와 동일어로 해석은 일러
북한 조선중앙TV가 보도한 지난 1월6일 노동당 제8차 대회의 2일차 회의가 모습. 참석자들이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당 기관지 ‘노동신문’의 당 대회 기사를 읽고 있다. 평양/조선중앙TV 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TV가 보도한 지난 1월6일 노동당 제8차 대회의 2일차 회의가 모습. 참석자들이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당 기관지 ‘노동신문’의 당 대회 기사를 읽고 있다. 평양/조선중앙TV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1월 조선노동당 8차 대회에서 당 규약의 “핵 병진노선” 문구를 없애고 “자력갱생 경제건설”을 새로 넣은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한겨레>가 1일 새 노동당 규약의 서문을 확인해보니, 이전 당규약의 “조선노동당은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틀어쥐고”라는 구절이 통째로 빠졌다. ‘노동당 8차 대회’ 닷새째인 1월9일 수정·채택한 새 당규약은 “경제·핵 건설 병진노선”을 삭제하고 “조선노동당은 자력갱생의 기치 밑에 경제건설을 다그치고 사회주의의 물질기술적 토대를 튼튼히 다지며”라는 문구를 새로 넣었다.

아울러 새 당규약은 “조선인민의 물질문화생활을 끊임없이 높이는 것”을 “노동당 활동의 최고 원칙”으로, “공화국 북반부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노동당의 당면 목적”으로 규정했다.

다만 “병진노선” 표현을 삭제하는 대신 “공화국 무력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부단히 강화하고 자립적 국방공업을 발전시켜 나라의 방위력을 끊임없이 다져나간다”는 문장을 새로 넣었다.

신·구 당규약을 비교해보면, ‘군사’에서 ‘경제’로 강조점 이동이 뚜렷하다. 이러한 변화는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기존 규약을 수정·채택한 뒤 특히 2018~2019년 기간에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주도로 여러 당중앙위 회의에서 이뤄진 결정들을 새 당규약에 반영한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노동당은 2018년 4월20일 ‘중앙위 7기3차 전원회의’에서 ‘경제·핵 건설 병진노선’의 종료 선언과 함께 “사회주의경제건설 총력 집중”을 “당의 (새) 전략노선”으로 채택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연쇄 정상회담(2018년 4월27일 판문점, 6월12일 싱가포르)을 앞둔 때다. 이어 김정은 위원장은 ‘노동당 중앙위 7기5차 전원회의’(2019년 12월28~31일)에서 “자력갱생과 제재의 대결”을 선언하며 “경제전선을 기본전선으로 한 (자력갱생식) 정면돌파전”을 제시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조미 간의 교착 상태는 불가피하게 장기성을 띠게 돼 있다”며 새로 벼린 ‘자력갱생 농성전략’이었다. 김 총비서는 지난 1월 당대회 연설에서도 “자력갱생, 자급자족”을 강조했다. 새 당규약의 “자력갱생 경제건설” “인민의 물질문화생활 높이기” 등은 이런 흐름 위에 있다.

‘경제·핵 건설 병진노선’은 김정은 위원장 집권 초기인 2013년 3월31일 “노동당 중앙위 3월 전원회의”에서 공식 채택된 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때 당규약 서문에 명시됐다. 병진노선 채택 뒤 4·5·6차 핵시험(2016년 1월6일과 9월9일, 2017년 9월3일)이 있었고, 2017년 11월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와 함께 김 위원장의 “국가핵무력 완성 선언”이 나왔다.

이런 흐름에 비춰 새 당규약의 “병진노선” 문구 삭제는 ‘예상 가능한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전략적 함의가 풍부한 ‘파격’이다. 새 당규약엔 “병진노선”이 삭제됐을 뿐만 아니라, “핵”이란 낱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2019년 4월11일 수정·채택된 현행 ‘사회주의헌법’ 서문에 “핵보유국”이란 표현이 명시된 사실에 비춰 의미심장한 ‘누락’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는 헌법 조항(11조)이 웅변하듯, 당이 국가를 만든 ‘당·국가 체제’로 스스로를 인식해온 북한에선 노동당 규약이 헌법보다 상위 규범이다. 더구나 새 당규약은 5년 뒤 8차 당대회 때까지 모든 노동당원의 활동을 규율하는 최고·최종 규범이라는 점에서 “병진노선” 삭제는 헌법 서문의 “핵보유국” 명시보다 미래의 함의가 풍부하다.

예컨대 새 당규약의 “병진노선” 삭제는, “한반도(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확약한 4·27 판문점선언과 6·12 북·미 공동성명의 연장선에서 김 위원장이 ‘비핵화와 체제 안전·활로 확보의 교환’이라는 대미 ‘핵외교’의 운신 폭을 넓히려는 사전 정지 작업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은 2018년 3월31일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한국 쪽은 당신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우리한테 말했는데 사실이냐’고 묻자 “나는 아버지다. 내 아이들이 평생을 핵무기를 짊어지고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답했다(밥 우드워드 <분노>). 김 위원장을 네 차례 직접 만난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로운 안보 환경이 조성되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김 위원장이 거듭 말했다고 여러 차례 전했다.

더구나 새 당규약에 추가·조정된 경제 관련 문구는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인민이 더는 고생을 모르고 유족하고 문명한 생활을 마음껏 누리게 하는 것”(2020년 10월10일 노동당 창건 75돌 기념 열병식 연설)이라는 김 위원장의 정책의지를 반영한다. 신·구 당규약을 비교하면 △“사회주의강성국가 건설”→“부강하고 문명한 사회주의 사회 건설”(당의 당면목적) △“인민생활을 끊임없이 높이는 것”→“물질문화생활을 끊임없이 높이는 것”(당 활동의 최고원칙) 등 ‘물질적 풍요’를 향한 갈망이 강력하다.

물론 김정은 총비서가 지난 1월 당대회 연설에서 “새로운 핵잠수함 설계 연구”를 처음으로 언급하고, 영변 등의 핵 활동도 여전해 당장 ‘병진노선’ 삭제를 ‘비핵화 의지’의 동의어로 해석할 수 없다는 점 또한 명백하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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