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올해 1월14일 저녁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노동당 8차 대회를 기념하는 열병식을 진행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5일 보도했다.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위원장이 검은 털모자를 쓴 채로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북한이 남한을 ‘혁명 대상’으로 명시한 조선노동당 규약 속 ‘북 주도 혁명 통일론’ 관련 문구를 지난 1월 당대회에서 삭제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한겨레>가 31일 조선노동당 새 규약의 서문을 확인한 결과, “조선노동당의 당면 목적”으로 제시됐던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 과업 수행”이라는 문구가 삭제됐다. 조선노동당 새 규약은 올해 열린 ‘8차 당대회’ 닷새째인 1월9일 수정·채택한 내용이다.
이는 김일성 주석이 1945년 12월17일 ‘민주기지론’(북은 남조선혁명과 조선반도 공산화의 전진기지라는 이론)을 제창한 이래 80년 가까이 유지해온 ‘북 주도 혁명 통일론’의 사실상 폐기이자, 남북관계 인식틀의 근본적 변화를 뜻한다. 아울러 노동당 규약의 ‘북 주도 혁명 통일론’ 문구가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여기는 국가보안법 존치론의 핵심 근거로 인용돼온 사정에 비춰, 한국 사회의 국가보안법 존폐 논쟁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 변화이기도 하다.
북한은 새 당규약을 채택하며 “조선노동당의 당면 목적”을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 과업 수행”에서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발전 실현”으로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북 주도 혁명 통일론’을 뜻하는 기존 규약의 여러 문구를 대폭 삭제·대체·조정했다.
기존 노동당 규약 서문의 “조선노동당은 사회의 민주화와 생존의 권리를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한다는 문구가 사라졌고, “민족의 공동 번영을 이룩”이라는 내용이 새로 들어갔다. 노동당 규약 본문의 “당원의 의무”(4조)에서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한다”는 문구는 대체 표현 없이 삭제했다.
노동당 규약은 남쪽의 헌법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권위를 지닌 최상위 규범이다. 당이 국가를 만든 ‘당·국가 체제’로 스스로를 인식해온 북한은 헌법 11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규정했고, 노동당 규약엔 “인민정권(정부 기구)은 당과 인민대중을 연결시키는 가장 포괄적 인전대(引傳帶)”라며 “인민정권이 당의 영도 밑에 활동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김정은 총비서를 수반으로 하는 조선노동당이 ‘북 주도 혁명 통일론’을 사실상 폐기한 조처는 그 의미를 크게 세 갈래로 나눠 짚을 수 있다.
첫째, 1990년대 초반 ‘비대칭 탈냉전’(한-중·한-소 수교, 북-미·북-일 적대 지속)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남과 북의 국력 차이로 ‘북 주도 통일’은커녕 ‘체제 생존’ 모색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염두에 둔 ‘현실’과 ‘통치 이데올로기’의 격차 해소 조처다. 앞서 북한은 ‘김정은 후계 구도’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3차 노동당대표자회(2010년 9월28일)에서 이전 당규약의 “남조선에서 식민지 통치 청산” 문구를 삭제하고,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에서 ‘인민’을 삭제해 ‘남조선혁명론’의 급진성을 완화하는 등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격차를 조심스레 줄여왔다.
특히 이런 움직임은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2012년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모색해온 “두개 조선”(Two Korea) 지향이라는 한반도의 미래상을 노동당 규약이라는 최상위 규범에 공식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앞서 김정은 총비서는 남북 사이 표준시에 30분의 시차를 둔 “평양시간”(2015년 8월15일~2018년 5월4일) 제정을 통한 ‘시공간 분단’ 시도, 김일성·김정일 “두 영원한 수령”의 ‘민족’ 담론을 ‘국가’ 담론으로 대체한 “우리 국가제일주의 시대” 천명 등으로 ‘통일’보다 ‘국가 정체성’ 강화에 집중해왔다.
둘째, 1991년 남과 북의 유엔 동시·분리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다섯 차례의 정상회담 등의 현실을 반영한 ‘공존’으로 방향 선회다. 첫째 이유와 맞닿은 이런 방향 선회는 북한이 앞으로 ‘통일’보다 ‘공존’ 모색 쪽에 대남정책의 무게중심을 싣는 추세를 강화하리라는 전망을 낳는다.
셋째, 북쪽의 노동당 규약 ‘혁명 통일론’ 폐기가 한국 사회 국가보안법 존폐 논쟁에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다. 앞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첫 남북정상회담 때 “국가보안법은 도대체 왜 폐기를 안 합니까? 우리도 남쪽에서 제기하는 옛날 당 규약과 강령을 새 당대회에서 개정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서로 하나씩 새것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10월 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상호 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각기 법률적 제도적 장치를 정비해 나가기로 했다”(‘10·4 정상선언’ 2조)고 약속했다. 이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하는 대표적 법·제도인 노동당 규약과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염두에 둔 합의다.
한편,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 주장과 관련한 노동당 규약 문구는 이번에도 삭제하지 않았다.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몰아내고”라는 기존 문구를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로 대체했다. 아울러 “온갖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끝장내며 일본군국주의의 재침 책동을 짓부시며”라는 기존 문구를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며 온갖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로 바꿨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