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선중앙TV는 올해 1월1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날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8차 당대회 기념 공연 '당을 노래하노라'를 관람했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1월 조선노동당 8차대회에서 개정한 당규약에 사실상 ‘잠재적 후계자’로 해석될 수 있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대리인” 조항을 새로 마련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한겨레>가 1일 새로 개정된 노동당의 새 당규약을 살펴보니, 기존 당규약엔 없었던 “당중앙위원회 제1비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대리인이다”라는 문장이 새로 추가돼 있음이 확인됐다. 노동당 8차대회 닷새째인 1월9일 수정·채택한 새 당규약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관련 규정인 26조에 “당중앙위원회는 당중앙위 제1비서, 비서들을 선거한다”는 문구와 함께 ‘노동당 총비서 대리인’ 규정을 신설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든 활동을 영도하는”(북한 헌법 11조) 조선노동당의 수반인 노동당의 총비서는 ‘백두혈통의 3대 계승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다.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노동당 총비서 대리인’ 조항은 2인자를 넘어 사실상 ‘잠재적 후계자’를 염두에 둔 조항으로 풀이된다. 앞서 노동당 중앙위 기관지 <노동신문>은 1월10일치 2면에 새 노동당 규약의 바뀐 내용을 소개했는데, ‘당 중앙위 제1비서’직을 신설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지금껏 이 직함에 공개 호명된 인물도 없다.
노동당 총비서의 대리인으로 규정된 ‘당 중앙위 제1비서’는 70여년에 이르는 조선노동당 역사에서 전례 없는 직책이다. 다만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직후인 2012년 4월11일 열린 ‘노동당 4차 대표자회’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하며 김정은 현 총비서를 ‘노동당 제1비서’로 추대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직책은 2016년 5월 열린 7차 당대회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존재했다. 추대 방식으로 임명된 당시의 ‘노동당 제1비서’와 이번에 신설된 선출 방식으로 뽑는 “노동당 중앙위 제1비서”는 여러 의미에서 함의가 다를 수밖에 없다.
북이 ‘당 중앙위 제1비서=당 총비서 대리인’ 제도를 마련하고도 지금껏 발표하지 않은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두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사실상 ‘잠재적 후계자’ 지명 제도로 보이는 이 조항을 뒷날을 염두에 둔 ‘예비 조항’으로 마련했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통치 제도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라 해석할 수 있다. 둘째로 특정인을 ‘당중앙위 제1비서’로 선출하고도 일부러 공개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서른여섯이라는 김정은 총비서의 나이(1984년 1월8일생)와 부친 김정일 시대와 달리 가급적 많은 사항을 공개하는 김정은 시대의 ‘공개주의’ 경향 등에 비춰볼 때 지금으로선 전자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 보인다.
당 제1비서, 통치 안정성 확보할 의도…‘백두혈통’ 아닌 제3인물 가능성 낮아
그렇다면, 대리인 조항은 누구를 구체적으로 염두에 둔 것일까. 2018년 2월 초 평창겨울철올림픽 때 김 총비서의 특사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뒤, 대남·대미 등 국정 여러 분야에서 ‘대리인’ 구실을 해온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김여정 부부장은 공개된 공식 직책과 무관하게 권력 핵심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해온 유일한 ‘백두혈통’이다. 백두혈통이란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이자 “영원한 수령”으로 불리는 김일성 주석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총비서로 이어지는 가계를 일컫는 북한식 용어다. 김여정 부부장은 2018년 이후 특히 대외정책 분야에서 김 총비서의 ‘대리인’ 구실을 해와 한국·미국·일본 등은 ‘김여정’을 “김정은과 이어지는 가장 정확하고 빠른 길”(정부 핵심 관계자)로 여긴다.
북한도 김여정 부부장이 ‘특별한 위상’임을 공공연하게 선전해왔다. 지난해 6월 김여정 부부장이 주도한 ‘대북전단 사태’가 대표적이다. 김 부부장의 ‘대북전단 비난 담화’(6월4일) 이후 북녘 각지에서 “궐기대회”가 잇따랐고 “각계 반향”이 <노동신문>에 며칠째 대서특필됐다. 아울러 김 부부장이 “대남사업을 총괄”하며 “지시를 내렸다”는 내용의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가 ‘인민 필독 매체’인 <노동신문> 2면 머리기사(6월6일치)로 실렸다. 북녘에서 특정인의 담화 이후 “궐기대회“ “각계 반향” “지시” 등이 이어지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최고지도자에만 해당하는 일이다.
한편에선 지난 당 8차대회에서 급부상한 조용원 당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군사위원이 ‘제1비서’에 선출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2월 열린 당 중앙위 2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와 정부의 간부들을 신랄히 비판했다”는 <노동신문> 보도(2월11일)와 3월 제1차 시·군당 책임비서 강습에서 ‘당중앙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더욱 철저히 세울데 대해’를 강의한 사실 등이 이런 추정의 근거로 꼽힌다. 그로 인해 조용원 상무위원이 사실상 ‘북의 2인자’이자 ‘김정은의 비서실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하지만 노동당을 오래 연구해온 복수의 전문가들은 “북에서 최고지도자의 대리인은 2인자라기보다 백두혈통만 맡을 수 있는 (잠재적) 후계자로 봐야 한다”고 짚었다. 이와 관련해 그동안 북한에 존재했던 ‘제1’이 들어가는 직책의 역사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김일성 주석 사후로 한정하면 1990~2000년대의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조명록), 현재의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최룡해) 등이 ‘권력 서열 2위’에 해당한다. 백두혈통이 아닌 이들한테는 “제1” 뒤에 “부(副)”자가 예외 없이 따라붙었다. ‘부’자가 따라붙지 않은 직책으로는 ‘백두혈통의 3대 승계자’인 김정은에게 붙여진 ‘당 제1비서’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2012년 4월13일)의 사례가 유이하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