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12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평양에서 제8차 노동당 대회를 마무리하고 있다. 지난 1월5일 시작한 당대회는 12일까지 8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이 남한을 ‘혁명 대상’으로 명시한 조선노동당 규약의 ‘북 주도 혁명통일론’ 문구를 지난 1월 당 대회에서 삭제한 사실이 <한겨레> 취재로 확인됐다. 북한 사회에서 노동당 규약은 우리의 헌법 같은 절대적 권위를 지닌 최상위 규범이다. 이는 북한이 해방 이후 80년 가까이 대남관계에서 유지해온 이른바 ‘적화통일론’을 사실상 폐기한 것을 뜻한다. 앞으로 북한의 대남정책이 ‘통일’보다 ‘공존’ 모색 쪽을 강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겨레>가 31일 조선노동당 새 규약의 서문을 확인한 결과, 북한은 ‘조선노동당의 당면 목적’을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 과업 수행”에서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발전 실현”으로 대체했다. 북한은 해방 직후 1945년 12월 ‘민주기지론’을 제창한 이래 ‘북 주도 혁명통일론’을 고수해왔다. 북한은 한반도 북쪽에 전조선 혁명을 위한 기지(민주기지)를 건설했으나 남한은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강점돼 ‘미해방 지구’로 남아 있는 만큼, 미 제국주의 침략 군대를 몰아내고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여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시키고 조국 통일을 완성해야 한다(국토완정)고 주장했다. 북한은 국토완정 논리를 내세워 1950년 한국전쟁을 벌였다. 민주기지론은 지난 1월까지 노동당 규약에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자리잡았다.
이밖에도 ‘북 주도 혁명통일론’을 뜻하는 당 규약의 여러 문구들이 대폭 삭제되거나 수정됐다. 기존 노동당 규약 서문의 “조선노동당은 사회의 민주화와 생존의 권리를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한다는 문구도 사라졌다. 북한은 이 문구를 1960·70년대 대규모 무장간첩 침투, 남한 내 지하조직 건설 등의 근거로 삼았다.
북한이 관련 규약들을 없앤 배경으로는 탈냉전 이후 북한 경제난으로 현격해진 남북 국력 격차가 꼽힌다. 현실성이 희박해진 북한 주도 통일을 접고 당분간 체제 생존에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2012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민족보다 국가를 꾸준히 강조해온 ‘2개 조선’ 지향을 당 규약에 명시적으로 담은 것으로 보인다.
노동당 규약의 ‘북한 주도 혁명통일론’이 국가보안법 존치 근거여서 우리 사회의 국가보안법 존폐 논쟁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안법은 적화통일을 최상위 규범으로 갖고 있는 반국가단체 북한에 맞서려면 필요하다는 명분에서 유지돼왔다. 노동당 규약과 보안법이 ‘적대적 공존’ 관계인 셈인데, 한쪽이 폐지되면 다른 한쪽의 존립 근거도 흔들리게 된다.
북한의 대남정책 변화는 노동당 규약 전문이 공개되고 북한의 행동이 구체화되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규약 개정이 남북관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정부는 북한의 의도를 면밀히 파악하고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