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문’ 들여다보니
제재해제·경수로, 6자회담 의제로 밀어놓고
‘결실있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단서 달아
북 언제든 되돌리기 가능…겨우 신뢰 첫걸음
제재해제·경수로, 6자회담 의제로 밀어놓고
‘결실있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단서 달아
북 언제든 되돌리기 가능…겨우 신뢰 첫걸음
북한과 미국이 7개월의 고위급 회담을 거친 뒤 29일 발표한 ‘합의문’은 언뜻 보면 북한이 대폭 양보한 것처럼 비춰진다. 하지만 양쪽의 대차대조표를 맞춰보면 절묘한 균형점에서 절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발표 형식과 내용을 따져보면 아직은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힘들어, 말 그대로 신뢰구축의 ‘첫 걸음’을 뗀 것으로 보인다.
일단 발표 형식 측면에서 살펴보면, 북-미 고위급 회담의 합의사항을 동시에 발표한 것은 그 자체로도 상당히 이례적이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만 해도 대체로 6자회담을 제외하곤 북-미 간에는 ‘비망록’ 형식의 비공개 합의가 일반적이었다. 북-미가 시간까지 맞춰 발표했다는 것은 세부적인 조율을 할 정도로 궁합이 맞는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도 숨어 있다.
발표 주체의 격은 다소 낮은 편이다. 북한은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형식, 즉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했다. 미국도 빅토리아 뉼런드 국무부 대변인 명의의 ‘언론 발표문’ 형식으로 처리했다. 6자회담 개최를 위한 ‘사전 회담’의 성격임을 강조하고, 미국 내에서 의회의 동의나 비준같은 까다로운 절차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격이 낮을수록 합의문의 구속력은 떨어진다는 점에서, 합의가 지켜지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북-미 모두 책임을 가볍게 하기 위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아직은 양쪽의 신뢰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이다.
내용적으로는 미국은 자신들이 요구한 6자회담 재개의 사전 조처들을 대부분 얻어낸 것처럼 비춰지지만 북한이 얻어낸 상응대가도 적지 않다. 우선, 미국은 그동안 줄곧 북한에 요구해온 비핵화 조처인 △핵실험·장거리미사일 모라토리엄(유예)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가동을 포함한 영변 핵활동 임시 중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팀 복귀 등을 발표문의 맨 앞에 담았다. 사실, 북한이 추가적으로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시험을 할 경우 핵무기 소형화와 장거리 운반수단의 완성도가 높아져 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미국 내에선 팽배했다. 이번 합의로 미국의 안보 위협을 일시적으로나 차단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실익을 얻은 셈이다. 이에 비해 북한이 손에 쥔 것은 ‘영양지원 24만톤’과 북한의 행동을 봐서 식량을 더 줄 수 있다는 ‘조건부 추가 지원’뿐이다. 북한이 오랫동안 우라늄농축시설을 가동하기 위해 공들여온 것에 비하면 값어치가 낮게 매겨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합의문을 보면, 북한이 언제든 이번 합의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는 ‘가역적’ 단서들을 달아놓았다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밑지는 장사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 쪽 발표에는 빠져 있긴 하지만, 북한은 핵실험·장거리미사일·핵프로그램의 임시 중지에 ‘결실있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이란 단서를 달아 미국을 옭아맸다. 미국 행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시간끌기’ 전략으로 나오면 회담을 깰 수도 있다는 의미다.
북한 쪽 발표에만 나와있긴 하지만, 북한이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온 제재 해제 문제와 경수로 제공문제를 6자회담의 의제로 일단 밀어올려 놓은 점도 북한 입장에선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북한을 더 이상 적대시하지 않으며 쌍무관계를 개선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점도, 원칙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북한 입장에선 미국이 ‘체제 인정’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밖에 미국이 문화, 교육, 체육 등 여러 분야에서 인적 교류를 확대하는 조처들을 취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미국을 방문하는 북한 인사들에 대한 비자 발급도 좀더 쉬워지고 북-미간 민간 교류도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용인 기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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