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때 광주에는 분명 북한군이 있었습니다!” “나가! 이 새끼야!” “이 빨갱이가!”
지난 6월16일, 21대 국회에서 열린 첫 5·18 역사왜곡처벌법 입법 공청회에 ‘북한군 5·18 개입설’을 주장하는 극우 유튜버들이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이어진 욕설·고성·멱살잡이에 5·18 유족들은 울분을 터트렸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공청회는 그 자체로 5·18 왜곡처벌법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5·18 왜곡처벌법만 통과되면 이런 5·18 폄하를 막을 수 있을까요?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5·18 왜곡처벌법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연내 처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부인·비방·왜곡·날조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2013년 지만원씨는 ‘북한군 5·18 개입설’을 유포해 명예훼손으로 기소됐다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지씨의 허위 주장이 특정한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정도가 되지 않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이렇게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아서 (사자)명예훼손이나 모욕죄 적용이 어려운 역사부정을 막아보자는 게 5·18 왜곡처벌법 도입의 취지입니다.
지난 2019년 2월 당시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주최한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에서 발표자로 나선 지만원씨가 인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법안에는 ‘예술·학문·보도 등의 목적이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달렸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민주당은 ‘유럽에서도 홀로코스트(2차 세계대전기 유대인 대학살) 부정을 처벌한다’며 반박하고 있고요. 하지만 유럽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논박은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유럽연합(EU)은 1996년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증에 대한 지침’을 채택했는데요. 인종, 종교, 민족 등 소수집단에 저질러진 전쟁범죄나 대량학살을 고의로 부인하거나 사소화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폴란드 등 꽤 많은 나라가 홀로코스트를 부인·축소·왜곡·찬동·사소화할 경우 처벌하는 ‘홀로코스트법’을 도입하고 있어요.
지난 1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 기념 특별전시에 걸린 사진. 1944년 5월 말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에 도착한 이들의 모습이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유럽이라고 ‘표현의 자유’ 논란이 없지 않습니다. 스페인은 1996년 ‘홀로코스트 부정죄’를 도입했지만 2007년에 헌법재판소에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고요.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은 논란 끝에 도입을 포기했습니다. 노엄 촘스키 등 세계적 석학 중에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이 있고요. 이런 틈을 타 홀로코스트 부정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피해자로 둔갑해 ‘양심수’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핵심은 유럽의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의 목적이 ‘단일한 역사관 강요’가 아니라 ‘인종차별 처벌’에 있다는 점입니다. 유럽 각국의 홀로코스트 부정자들은 처벌을 받게 되자 유럽인권협약이 정한 ‘표현의 자유’를 들어 호소하고 있는데요. 유럽인권법원은 “타인의 자유를 파괴한 자에게 자유를 부여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홀로코스트 부정자들의 제소를 기각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는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도 함께 따른다는 취지입니다. 처벌법이 없는 나라에서도 홀로코스트 부정자들을 인종차별 선동죄 등 다른 법률로 처벌하는 이유입니다.
5·18 당시 이뤄진 민간인 학살도 홀로코스트처럼 반인륜범죄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호남차별과 ‘빨갱이 몰이’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는 5·18 역사부정에 대한 논의가 ‘역사왜곡’보다는 ’반인륜범죄 재발방지’와 ‘소수자 차별’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5·18에 대한 부정이 허위사실 유포 차원이 아닌 ‘차별과 혐오의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표현의 자유’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으니까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5월17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유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광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런 점에서 민주당이 ‘차별과 혐오’에 대한 논의를 누락한 채 “5·18 왜곡은 잘못된 역사인식의 전파이기에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에 머무른 것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민주당에서는 5·18 왜곡처벌법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역사왜곡은 아이들 역사관 형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나라의 정체성을 흔드는 정신적 내란죄”(양향자 의원)라거나 “21대 총선에서 광주·전남이 18석 모두 민주당을 선택한 의미는 ‘5·18 역사를 바로 세우라’는 것”(송갑석 의원)이라는 발언도 나옵니다. 역사왜곡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국가가 특정 역사관을 강제한다는 우려를 부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제강점기와 세월호 참사 등으로 ‘역사왜곡 처벌’의 대상을 넓히자는 주장도 나옵니다. 문제는 이럴 경우 5·18 왜곡처벌법의 정당성이 오히려 약화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6·25 북침설을 펴거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를 옹호하는 행위도 처벌하자는 주장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5·18 4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지난 5월16일, 광주 오월시민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5·18 희생자의 모습을 인형으로 제작해 행진하고 있다. 광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부)는 “홀로코스트 부정을 예민하게 다루는 유럽이나 캐나다·호주에서는 이걸 ‘차별 조장’으로 보는 합의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고민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마치 특정 역사관 자체를 처벌하는 것처럼 논의가 진행되면 법의 취지 자체가 흐려질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5·18 왜곡처벌법이 ’표현의 자유’ 논란을 뛰어넘으려면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라 ‘차별과 혐오 문제’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민주화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