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택배노동자가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바라보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 문제가 잇따르자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더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 대책을 서둘러 달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21일 “하나의 업종에서 지속적 사망자가 나온다는 건 이미 구조적 문제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라며 “정부가 택배업체 안전·보건 조치에 긴급 점검에 나섰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근본적인 대책을 강조했습니다. 민주당은 택배노동자를 포함한 ‘필수노동자’ 보호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당내 티에프(TF)를 구성하기도 했고요. 정치권의 관심이 모처럼 일제히 택배노동자를 향해 쏠렸습니다. 과연 비상한 대책을 내놓는 걸까요?
최근 택배 사업주가 보험료 납부를 회피하기 위해 택배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서’를 대필한다는 의혹까지 일었습니다. 그러자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 사유’를 축소하는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적용제외 신청을 할 수 없도록 신청 요건을 엄격하게 바꿔야 한다”고 힘을 실었고요.
물론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이번 민주당의 주장이 19대 국회 때 새누리당이 발의한 법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이미 2013년 최봉홍 당시 새누리당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과제였던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 사유 제한’ 법안을 발의한 바 있습니다. 당시 민주당은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 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모든 특고에 산재보험을 당연적용하는 개정안(정청래 의원 발의)으로 맞섰고요. 결국 새누리당 안으로 여야 합의가 이뤄졌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발목이 잡혀 법안이 폐기되고 말았어요.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오늘날, 특고의 노동환경은 더욱 열악해졌지만 민주당은 6년 전 보수정당의 주장에서 별다른 진일보를 보여주지 못한 셈입니다.
최근 민주당 필수노동자 티에프(TF)에서 준비 중인 ‘필수노동자 보호법’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당 관계자는 “필수노동자 보호법에는 감염병예방법이나 재난안전법이 규정하는 재난·재해 상황에 한하여, 필수노동자들에게 수당이나 관련 물품을 지원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상시로 해고 위기에 내몰리고 부당한 처우를 당해도 ‘을 중의 을’이라 항의도 못 하는 필수노동자들을 ‘재난 시기’로 한정해 보호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특고 신분인 필수노동자들은 경제 위기 앞에 속수무책으로 일자리를 잃곤 하기 때문에 보호법 적용을 아예 받지 못할 가능성도 큽니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택배노동자의 보호하기 위해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 제정을 약속하고 있죠. 택배노동자에게 계약갱신청구권을 부여하고 택배사에 휴식보장·안전시설 확충 노력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입니다. 이 역시 없는 것보다 낫겠지만 땜질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특고의 열악한 근무여건을 해결할 핵심적인 해결책은 노동자성 인정입니다. 지난 6일 정부가 발표한 ‘필수노동자 안전 및 보호 강화 대책’은 ‘노동자성 없는 노동 보호’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대책을 살펴보면, 정부는 배달플랫폼과 배달노동자 산재보험 사각지대를 없애자는 ‘업무협약’을 맺겠다고 합니다. 퀵서비스 기사의 불공정 거래를 막기 위해 업계에 표준계약서 작성을 ‘권고’하기로 했고요. 특고 조직화를 위해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산재보험 △근로계약서 △노동조합 등은 법으로 강제되어 노동자라면 누구나 보장받는 권리지요.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특고들은 이런 권리를 ‘협약’ ‘권고’ ‘지원’을 통해 겨우 얻어냅니다.
“목말라 죽기 직전인 사람에게 물을 ‘반 잔’만 준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물을 절실하게 받아 마신다. 하지만 그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정부·여당은 언제나 시급한 노동 현안 앞에 물을 반 잔씩만 내밀어 왔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의 말입니다.
특고의 노동자성 인정이 가장 핵심적인 해결책이라는 점을 정부·여당도 모르지 않습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야당 반대’를 이유로 특고 고용보험 적용을 미뤄온 민주당 관계자들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한걸음에 다 갈 수 없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말합니다. 혹시 174석을 가지게 된 민주당에게는 ‘야당의 지지’나 ‘시간적 여유’가 아니라 용기가 부족한 건 아닐까요? 끝을 알 수 없는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목마른 취약노동자들은 언제쯤 ‘물 반 잔’이 아닌 ‘우물’을 가지게 될까요? 계속해서 ‘물 반 잔’만 내밀 거라면 민주당은 ‘노동존중사회’라는 슬로건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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