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국회에서 장혜영 의원(오른쪽 셋째) 등 정의당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21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대 국회에서 발의조차 되지 못했던 ‘차별금지법’에 다시 시동이 걸렸습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14일 국회 소통관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동참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장 의원은 이 자리에서 “정의당이 추진하는 차별금지법은 ‘우리 모두’를 보호하는 법”이라며 여·야당 국회의원들의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장 의원의 말이 더 절실하게 들렸던 것은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비극 때문입니다. 지난달 25일 미국 미네소타주에서는 위조지폐가 사용됐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이 무장도 저항도 하지 않았던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체포하던 중 무릎으로 8분46초 동안 목을 눌러 숨지게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뒤로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가 흑인이었기에 경찰의 폭력에 희생됐다는 여론이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극적 죽음을 함께 추모한 이들이 있습니다. 지난 10일 한무경 미래통합당 의원 등 초선 의원 9명은 “우리는 헌법에 규정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 어떠한 형태의 차별에 대해서 반대한다”며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국회 중앙홀에 섰습니다. 그들은 8분46초 동안 무릎을 꿇고 묵념을 하며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는 세계적 움직임에 힘을 보탰습니다.
이처럼 ‘차별에 반대한다’는 것은 여야를 떠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뜻을 고스란히 법으로 옮기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는 이들은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것은 2007년 17대 국회 때였습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법무부는 차별금지법을 정부 입법으로 발의했습니다. 국회에서는 노회찬 전 정의당 원내대표가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두 법안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습니다. 18대 국회에서도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차별금지법을 발의했지만 역시 임기만료로 폐기되는 운명을 겪었습니다.
19대 국회 때는 드디어 민주통합당도 차별금지법 발의에 힘을 실었습니다. 2013년 당시 김한길·최원식 민주통합당 의원이 각각 법안을 발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두 의원은 교회 등의 반발에 못 이겨 결국 법안을 철회해야 했습니다. 당시 법안을 발의한 의원실 관계자는 “공동 발의했던 의원들이 하나, 둘 철회 의사를 밝혔다. 다들 지역구 등에서 거센 압박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 법안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김재연 당시 통합진보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임기만료로 폐기되었습니다.
20대 국회 때에는 법안 발의조차 실패했습니다. 정의당에서 차별금지법을 발의하려 했지만 법안 발의를 위해서는 10명이 필요했습니다. 정의당 의석은 6석뿐이었기 때문에 4명이 더 동참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의원은 금태섭 전 의원 정도뿐이었습니다. 물론 억지로 만들면 10명을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9대 국회 때의 사례가 반복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여간한 의지가 아니라면 참여한 의원들이 공동발의를 철회할 가능성이 컸고, 그렇게 다시 법안 발의가 무산된다면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21대 국회 들어서는 상황이 다소 다르긴 합니다. 정의당은 임기 초반부터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6월 중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한 입장을 정리하고 7월 이후 본격적으로 입법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인권위는 아직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을 정부 입법으로 할지 의원 입법으로 할지 결론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인권위 안팎에서는 정부 입법으로 추진할 경우 주무 부서인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의 취지를 잘 살려 법안을 발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있습니다. 정부 입법으로 법 제정이 추진됐던 17대 국회 때 실제 시민사회가 생각했던 법안보다 대폭 후퇴된 내용으로 발의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권위에서도 국회의원들이 발의하는 입법 전략에 무게가 다소 실리는 분위기입니다.
정의당에 이어 인권위에서도 법 제정을 추진하면 좋든 싫든 7월부터 국회는 차별금지법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어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176석의 거대여당인 민주당입니다. 민주당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다면 차별금지법은 통과는커녕 발의조차도 쉽지 않은 것이 현재 국회의 상황입니다.
차별금지법이 발의되기 위해서는 우선 정의당 의원 외에 4명이 필요합니다. 민주당 176명의 의원 중 2.27%입니다.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긴 했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나서는 민주당 의원은 아직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정의당에서도 공동발의를 할 여당 의원을 찾는 게 쉽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20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토론회를 주최하고 퀴어 퍼레이드에도 참여하며 법 제정에 의지를 보였던 금태섭 전 의원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결국 당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의지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개별 의원이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 크다”고 말했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소신으로 삼는 민주당 의원 4명이 함께 법 제정에 시동을 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당의 의지가 무엇보다 더 필요한 셈입니다. 150명이 넘는 의원이 공동발의를 해 부담을 나누는 것도 방법입니다. 하지만 아직 민주당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미온적입니다. 당 관계자는 “아직 차별금지법과 관련해서 특별히 이전과 다른 당내 입장이 정리된 것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21대 국회는 거대여당을 탄생시켰습니다. 민주당은 코로나 위기 극복과 총선 민심을 명분으로 강력한 여당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인종·종교 등 각종 차별을 없애는 데 민주당이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 시금석이 될 터입니다. 강한 여당의 힘이 가장 먼저 스며드는 곳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곳이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21대 국회를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