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_이지혜의 지혜로운 국회생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8회 공판(1980년 9월 13일)에서 김대중 최후진술 사료.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제공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이해찬 최후진술 사료.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제공
시퍼렇게 젊은 놈이 여태 살아있어 죄송하다. (…) 가슴 아프게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다. 그런데 구차하게 이 자리에서 징역을 구걸하겠는가?
최근 옥중에서 1958년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 외 21명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 내용을 읽었다. (…) 이 재판을 받으며 그때와의 유사점 발견한다. 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합법을 가장하여 정적을 살해하려 하고 있는 점이다.
나는 김대중씨를 존경하지도, 개인적으로 알지도, 그의 정치노선이나 생각에 따르지도 않았지만, 또 다시 합법을 위장하여 한 정적이, 한 가정의 아버지가, 남편이 무참히 죽어가게 되었다. (중략)
반공법·보안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분단된 시대를 산다는 데 있다. (…) 이 민족은 언젠가 통일을 이루어 갈 것이다.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이러한 불상사는 시정이 될 것이다. 구차하게 징역을 구걸하지 않겠다. 민중적 지혜의 힘에 감사드린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이해찬 최후진술.
인간이란 것이 얼마나 나약한지 죽지 못해 몹시 부끄럽다. 5월12일 장기표가 “각목, 화염병 준비…” 얘기를 했다는 것을 시인하라고 해서 “그것만은 못한다. 나를 죽여달라”고 했다. (가족석에서 가족들 눈물 흘리기 시작…)
시인 요구 전에도 다른 곳으로 끌려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곤욕을 치렀었다. (…) 뉘어 놓고는 무수히 구타했다. 그래 결국 죽지 못하고 시인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앞으로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인지 결정을 못 하고 있다. 지금까지 설교 때마다 “예, 아니오는 확실히 해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해놓고는 내가 그것을 못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교인 앞에 나설 수가 있다는 말인가? (중략)
지도곤히 때리고 나서는 엎드리게 하고, 소고기(날고기)를 썰어 맨살에 붙이고는 비니루로 동여매 놓고 3일을 있었다. (…) 내가 한 시인 때문에 다른 분들께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되고 김대중 선생님에게는 사형까지 구형하게 되어 죄송하다. (후략)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이해동 최후진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설훈 최후진술 사료.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제공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후부터는 거의 고함에 가까운 고성) 현재 나가고 있는 길은 멸망의 길이다.
5월17일 이전에는 솔직히 평화 시위를 계획했는데 광주 사태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 구차한 목숨 바칠 각오를 했다. 지금 몇몇 분들이 눈물을 보이셨는데 고문당한걸 가지고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광주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는가? 이 눈물은 그 사람들에게 보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대에 총을 줄 때는 국민을, 국가를 지키라는 것이지 국민을 죽이라고 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계엄군은 시민을 패고, 밟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것으로 안다. 시체를 자동차에 매달고 달린 것으로 안다. 이게 어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나는 나 하나 죽더라도 이 나라가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 이 난국을 수습하는 길은 군은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야 한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설훈 최후진술.
(…)
검찰에서는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어 학생 데모를 통해 집권하려 했다고 공소장에서 말하고 있으나, 나는 총 한 방 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 바랐던 것은 선거였으며, 선거만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집권할 수 있거나 적어도 4년 후에 대비한 튼튼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혼란이 오면 집권은커녕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처하게 되며, 사실은 오늘날 같은 사태가 올 것도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비폭력 주의자다. 그렇다고 무저항주의는 아니므로 나는 비폭력저항주의자다.
(…)
당국이 나의 형을 집행하려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으나 이것이 과연 법의 정의에 합당하며 민주국가로서 옳은 일인가 심사숙고해주기 바란다. 나는 나에 대한 관대한 처분보다는 다른 피고들에 대한 관용을 바란다. 결국 이분들에 대한 혐의의 책임자는 나이기 때문이다. (…)
나는 그제 (사형) 구형을 받았을 때 의외로 차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은 물론 공판정에 나왔었기 때문도 있겠으나 평소보다 더욱 잘 잤다. 그것은 내가 기독교 신자로서 하느님이 원하시면 이 재판부를 통하여 나를 죽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재판부를 통하여 나를 살릴 것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앉아계신 피고들께 부탁드린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8회 공판(1980년 9월 13일)에서 김대중 최후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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