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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40년 전 ‘김대중내란음모’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등록 2020-05-15 17:09수정 2020-05-15 19:01

정치BAR_이지혜의 지혜로운 국회생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8회 공판(1980년 9월 13일)에서 김대중 최후진술 사료.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제공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8회 공판(1980년 9월 13일)에서 김대중 최후진술 사료.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제공
“시퍼렇게 젊은 놈이 여태 살아있어 죄송하다. (…) 가슴 아프게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다. 그런데 구차하게 이 자리에서 징역을 구걸하겠는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이 열렸던 1980년 9월 12일. 28살의 젊은 민주 투사였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최후진술입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김대중과 재야인사들이 내란을 꾀하며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였다”고 꾸며낸 ‘역사적인’ 사기극이지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내린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지난 14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의 사료를 공개했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 중 김대중, 이해찬, 설훈, 문익환 등 민주 투사들의 최후진술문입니다.

당시 법정에는 녹음기나 필기도구를 가져갈 수 없었는데요. 이번에 공개된 사료는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씨를 비롯한 민주 투사의 가족들이 진술 내용을 달달 외워 복기한 자료입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된 최후진술문을 읽어내려가기만 해도 충격적인 역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이해찬 최후진술 사료.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제공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이해찬 최후진술 사료.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제공
이제는 177석의 ‘슈퍼 여당’을 이끄는 원로 정치인이 된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당시 28살의 서울대학교 복학생협의회장이었습니다.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돼 내란음모·계엄법 위반·계엄법 위반 교사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았지요. 이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에 이어 두번째였습니다. “시퍼렇게 젊은 놈이 여태 살아있어 죄송하다”는 첫마디로 최후진술을 시작한 이 대표의 착잡한 심정이 짐작됩니다. 이 최후진술이 있고 닷새 뒤 이 대표는 징역 10년을 받았습니다.

시퍼렇게 젊은 놈이 여태 살아있어 죄송하다. (…) 가슴 아프게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다. 그런데 구차하게 이 자리에서 징역을 구걸하겠는가?

최근 옥중에서 1958년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 외 21명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 내용을 읽었다. (…) 이 재판을 받으며 그때와의 유사점 발견한다. 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합법을 가장하여 정적을 살해하려 하고 있는 점이다.

나는 김대중씨를 존경하지도, 개인적으로 알지도, 그의 정치노선이나 생각에 따르지도 않았지만, 또 다시 합법을 위장하여 한 정적이, 한 가정의 아버지가, 남편이 무참히 죽어가게 되었다. (중략)

반공법·보안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분단된 시대를 산다는 데 있다. (…) 이 민족은 언젠가 통일을 이루어 갈 것이다.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이러한 불상사는 시정이 될 것이다. 구차하게 징역을 구걸하지 않겠다. 민중적 지혜의 힘에 감사드린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이해찬 최후진술.

이 자리에서는 중앙정보부의 고문을 폭로하는 진술도 나왔습니다. 문익환 목사의 제자이자 민주화 운동 동지였던 이해동 목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 목사는 계엄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나흘씩 잠도 못 자고 수차례 발가벗겨진 채로 온갖 수모를 받았다며 고문의 참상을 전했습니다. 연이은 구타로 이 목사의 몸이 멍투성이가 되고 나면 고문관들이 피멍을 빼기 위해 날고기를 몸에 붙여줬다는 대목에서는 중앙정보부의 잔인함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당시 법정에는 이 목사를 시작으로 고문 폭로가 이어지자 오열하는 피고인과 방청객이 많았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것이 얼마나 나약한지 죽지 못해 몹시 부끄럽다. 5월12일 장기표가 “각목, 화염병 준비…” 얘기를 했다는 것을 시인하라고 해서 “그것만은 못한다. 나를 죽여달라”고 했다. (가족석에서 가족들 눈물 흘리기 시작…)

시인 요구 전에도 다른 곳으로 끌려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곤욕을 치렀었다. (…) 뉘어 놓고는 무수히 구타했다. 그래 결국 죽지 못하고 시인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앞으로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인지 결정을 못 하고 있다. 지금까지 설교 때마다 “예, 아니오는 확실히 해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해놓고는 내가 그것을 못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교인 앞에 나설 수가 있다는 말인가? (중략)

지도곤히 때리고 나서는 엎드리게 하고, 소고기(날고기)를 썰어 맨살에 붙이고는 비니루로 동여매 놓고 3일을 있었다. (…) 내가 한 시인 때문에 다른 분들께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되고 김대중 선생님에게는 사형까지 구형하게 되어 죄송하다. (후략)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이해동 최후진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설훈 최후진술 사료.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제공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설훈 최후진술 사료.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제공
이제 5선 의원으로 민주당 ‘중진’인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도 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내란음모·계엄법 위반 혐의였습니다. 당시 27살의 고려대 운동권 학생이었던 설 위원의 최후진술에서는 성미가 괄괄하고 입심 좋은 그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기록에는 그가 “거의 고함에 가까운 고성”을 질렀다고 적혀있습니다.

설 위원은 고문 폭로에 충격을 받아 흐느끼는 가족들에게도 호통을 쳤습니다. “광주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느냐”고 따져 물으며 “고문당한걸 가지고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당시 설 위원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후부터는 거의 고함에 가까운 고성) 현재 나가고 있는 길은 멸망의 길이다.

5월17일 이전에는 솔직히 평화 시위를 계획했는데 광주 사태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 구차한 목숨 바칠 각오를 했다. 지금 몇몇 분들이 눈물을 보이셨는데 고문당한걸 가지고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광주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는가? 이 눈물은 그 사람들에게 보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대에 총을 줄 때는 국민을, 국가를 지키라는 것이지 국민을 죽이라고 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계엄군은 시민을 패고, 밟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것으로 안다. 시체를 자동차에 매달고 달린 것으로 안다. 이게 어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나는 나 하나 죽더라도 이 나라가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 이 난국을 수습하는 길은 군은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야 한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7회 공판(1980년 9월 12일)에서 설훈 최후진술.

다음날인 1980년 9월 13일, 오전 10시부터 18회 공판이 열려 ‘피고 김대중’의 최후진술이 이어졌습니다. 공판 개시 전 분위기는 의외로 화기애애합니다. 기록에는 가족들이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김종완 전 민주당 의원에게 ‘돼지가 새끼 9마리를 낳았대요’라고 말하자 김 전 의원이 ‘나는 (감옥) 들어와 밥도 안 축내고 밖에서는 돼지 길러 돈 벌고 안팎으로 버는 거야’라며 농담을 해서 다들 웃었다고 적혀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최후진술은 오전 11시 45분까지 이어져 거의 2시간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김 전 대통령이 진술 마지막에 말했듯 일종의 ‘유언’이었습니다.

(…)

검찰에서는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어 학생 데모를 통해 집권하려 했다고 공소장에서 말하고 있으나, 나는 총 한 방 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 바랐던 것은 선거였으며, 선거만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집권할 수 있거나 적어도 4년 후에 대비한 튼튼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혼란이 오면 집권은커녕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처하게 되며, 사실은 오늘날 같은 사태가 올 것도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비폭력 주의자다. 그렇다고 무저항주의는 아니므로 나는 비폭력저항주의자다.

(…)

당국이 나의 형을 집행하려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으나 이것이 과연 법의 정의에 합당하며 민주국가로서 옳은 일인가 심사숙고해주기 바란다. 나는 나에 대한 관대한 처분보다는 다른 피고들에 대한 관용을 바란다. 결국 이분들에 대한 혐의의 책임자는 나이기 때문이다. (…)

나는 그제 (사형) 구형을 받았을 때 의외로 차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은 물론 공판정에 나왔었기 때문도 있겠으나 평소보다 더욱 잘 잤다. 그것은 내가 기독교 신자로서 하느님이 원하시면 이 재판부를 통하여 나를 죽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재판부를 통하여 나를 살릴 것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앉아계신 피고들께 부탁드린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심 재판의 18회 공판(1980년 9월 13일)에서 김대중 최후진술.

진술이 끝나자 가족들의 박수가 이어졌고 법정은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기록에는 문익환 목사의 배우자인 박용길 장로의 선창으로 피고의 가족들이 ‘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하자 장내 정리 요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강제 퇴정시켰다고 적혀있습니다. “조작극이다!” “민주주의 만세!” 등의 고함이 터지고 심한 몸싸움도 이어졌습니다. 가족들은 법정 밖으로 끌려 나오는 와중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고요. 처절한 한국 근현대사의 한 장면입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1980년 9월 17일.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국제사회에서는 대대적인 ‘김대중 구명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에게 김 전 대통령의 선처를 당부했지요. 결국 1982년 12월 김 전 대통령은 형 집행정지로 출소해 미국으로 사실상의 망명을 떠났습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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