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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JP가 퇴장한 날, 1990년 ‘3당 합당’을 다시 생각하다

등록 2018-06-23 12:45수정 2018-06-23 14:47

1990년 민자당 3당 합당 발표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손 맞잡아
1990년 총선 여소야대→여대야소로 재편
3당 합당 이후 영남보수 패권주의 강화
6·13 지방선거에서 비로소 균열
‘지역주의 균열·JP 퇴장’을 함께 보는 아이러니
1990년 초, 3당 합당으로 이뤄진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에 모인 김종필(오른쪽부터), 노태우, 김영삼 등.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 초, 3당 합당으로 이뤄진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에 모인 김종필(오른쪽부터), 노태우, 김영삼 등. <한겨레> 자료사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하면서,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끈 ‘3김 시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주인공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됐다. 두 사람(김대중·김영삼)은 대통령이 됐지만, 김 전 총리는 대통령 자리에 오르지 못한 2인자에 머물렀다. 하지만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 대통령’(1992년)을, '디제이피(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1997년)의 당선을 결과적로 도왔다.

‘3김 시대’의 마지막 주인공인 김 전 총리의 퇴장과 함께 다시 의미있게 돌아볼 기간은 1988년 4월부터 1990년 1월까지다.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애증과 권력관계가 뒤엉킨 이 시기를 거치며 ‘강화된 지역주의’와 ‘영남 패권주의’가 한국 정치에 자리잡는 격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야권은 ‘양김’(김영삼·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의 연장을 막아내지 못했다. ‘양김’이 각자 얻은 표의 총합이 노태우 당선자보다 416만 표나 더 많았다. 훗날 김영삼은 당시의 야권 분열을 “천추의 한”이라 했고, 김대중은 “나라도 양보했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그리고 1988년 4월 총선을 맞이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평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 등 ‘1노3김’이 맞붙은 선거였다. 87년 거리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따냈던 시민들은 88년 총선을 통해 헌정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를 만들어내며 군사정권을 견제할 힘을 야권에 실어줬다. 여당인 민정당이 299석 중 125석을 얻어 제1당이 됐지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평민당이 70석, 민주당이 59석, 공화당이 35석, 무소속이 9석, 한겨레민주당이 1석을 차지했다.

이때 총선은 뚜렷한 지역 기반 선거였다. 노태우의 민정당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은 호남에서, 김영삼의 민주당은 부산·경남에서, 김종필의 공화당은 충청에서 각 당의 전국 평균 득표율보다 웃도는 지지를 받았다. 이를 두고 당시 김재순 국회의장은 13대 국회 개원식에서 “정치의 황금분할”이라 평했지만 “지역주의에 기댄 분할 체제”란 여론의 우려가 적지 않았다.

‘여소야대’가 짜였지만, 특히 김영삼에겐 탐탁지 않은 결과였다. 필생의 라이벌이던 김대중 때문이었다. 총선 전국 득표율에선 민주당(23.8%)이 평민당(19.3%)보다 앞섰지만 의석수에서 평민당에 11석이나 뒤지며 제3당으로 밀렸다. 평민당이 호남과 서울에서 선전했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 동양관광호텔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보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김영삼은 “전국적으로 2위의 득표율을 기록하고도 의석수에서 평민당에 밀린 것은 민정당이 민주당을 영남에서 견제하며 선거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내 지역구인 부산 서구에 출마하느라 서울 지역 지원 유세에 다소 소홀했다”고 아쉬워했다. 이 총선 선거 결과는 한국 정치 지형에 대격변을 부르는 서막이었다.

‘여소야대’ 체제에서 16년 만에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부활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 청문회가 도입돼 5공화국 실세들이 ‘5공비리특별위원회’의 증언대로 불려나왔다. 대통령이 요청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헌정 사상 처음 부결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때 대법관으로 임명된 정기승씨를 노태우 정부에서 대법원장으로 앉히려는 시도를 야권이 저지한 것이다. 모두 1988년에 있었던 일이다.

김영삼은 흡족할 수 없었다. 집권여당과 맞서며 정국에 영향을 미치는 제2당의 위치에 자신이 아닌 김대중이 있었다. 공화당의 김종필은 1989년 봄, 어떤 사석에서 나머지 3개 정당 총재의 성향을 이렇게 빗댔다(1992년 <월간조선> 보도).

“망설임과 우유부단으로 일을 그르치는 햄릿(노태우), 죽는 줄 알면서도 지구는 돈다고 외치며 결국 최악과 마주하는 갈릴레오(김대중), 좌충우돌하며 정견도 없이 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불행하다고 볼 수 없는 돈키호테(김영삼).”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보다 많은 표를 얻은 김영삼은 의회 권력에서 3순위로 밀린 처지를 흔쾌히 감내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때 공약한 ‘임기 중 중간평가’를 연기한다는 담화를 89년 3월에 발표하자, 김영삼은 이 상황을 자신의 위상을 올리는 계기로 삼는다. 당시 김대중은 5공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간평가 투표를 했다가 자칫 6공 정부 재신임을 해주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며 중간평가에 반대했다.

중간평가를 강력히 요구하던 김영삼은 1989년 4월 동해시 보궐선거를 ‘6공 정부 중간평가’로 규정하고 선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측근인 당 사무총장이 상대 후보를 돈으로 매수하는 사건이 벌어져 구속됐고, 당 총재인 김영삼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당 사무총장이 구속되자 김영삼이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 언론들은 전한다.

민정당의 인위적 정계 개편 움직임은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서 가동됐다. 1988년 4월 총선을 통해 구성된 ‘여소야대’ 구조를 뒤엎고 싶었던 민정당의 노태우, 제3당의 위치로 전락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민주당의 김영삼, 그리고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경험이 있지만 권력 최고 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공화당의 김종필.

정권 유지(민정당), 권력 획득과 권력 참여(민주당·공화당)라는 각각의 필요가 맞물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후보 매수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김영삼은 92년 대선에서 재출마가 확실시되는 김대중의 지지세를 뛰어넘는 어떤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정계개편의 움직임은 1989년 10월2일 한 골프 사진을 통해 감지됐다. 김영삼과 김종필은 당시 자신들의 골프 회동을 언론에 공개했다. 신문은 골프채를 휘두르다 휘청이는 김영삼 뒤에서 크게 웃는 김종필의 모습을 사진으로 실었다. 둘은 골프를 마치고 “두 총재가 우정과 소신을 가지고 협력해나가기로 한다”는 합의문을 내놓았다. 김영삼은 1990년 1월5일 시무식에서 ‘정개 개편 추진 의사’를 밝혔고, 언론은 “민주·공화당의 합당” 정도의 전망 기사를 내놓았다. 그해 1월6일 서울 근교 뉴코리아 컨트리클럽에서 김종필과 골프 회동을 한 김영삼은 기자들에게 “아니, 누가 합당한다고 했나? 나는 공화당의 ‘공’자도 꺼낸 적이 없어”라고 손사래를 쳤다. 물론 거짓이었다. 게다가 정계개편의 폭은 김영삼·김종필의 합당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3당 합당 축하연에서 함께 손을 맞잡고 있는 김종필(오른쪽부터), 노태우, 김영삼. <한겨레> 자료사진
3당 합당 축하연에서 함께 손을 맞잡고 있는 김종필(오른쪽부터), 노태우, 김영삼. <한겨레> 자료사진
그해 1월22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청와대에서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새롭게 합치는 ‘3당 합당’이란 광폭의 정계 개편을 발표했다. 1988년 총선에서 민심이 만든 ‘여소야대’는 ‘거대 여당(민자당)과 군소 야당(평민당)’으로 강제 재편됐다. 신생 민자당은 개헌이 가능한 199석보다 더 많은 216석을 거느리게 됐다. 갑작스럽게 민자당이 출현한 탓에, 어떤 방송 뉴스에선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쳐져 장기 집권을 이어간 일본의 자민당과 헷갈려 민자당을 자민당으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과 시민은 ‘3당 야합, 정치 쿠데타’라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해 3월엔 김영삼을 지지했던 부산에서 시민 10만 명이 참여한 3당 합당 규탄 집회가 열렸다.

당시 보수대연합으로 불린 3당 합당은 대구·경북의 민정당과 부산·경남의 민주당이 합쳐져 강고한 ‘영남 패권’을 결성하고 여기에 김종필이 이끈 ‘충청의 공화당’이 합세한 세력 재편이었다. 비호남권 정당의 합당으로, 호남권(평민당)을 포위한 전략이었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 이후 한국 정치는 “지역주의가 질적으로 더 악성화”되는 결과를 안게 됐다. “호남 배제를 위한 영남 지역 지배 엘리트들의 선행적 공세→이에 대응하는 호남 지역 사람들의 방어→(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지역주의가 더 강화”(김태일 영남대 교수)됐다는 것이다.

3당 합당 여파는 최근까지 계속 이어졌다.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오래 활동한 영남 출신 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3당 합당으로) 더 강해진 지역주의가 정치에 끼어들면서 정치가 왜곡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정책, 가치,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이다. YS(김영삼)를 지지했던 민주·개혁 성향의 비호남 세력(유권자)들이 3당 합당 이후 정처 없이 떠도는 상황도 벌어졌다. 특히 영남 지역 유권자들은 제3의 정치 세력을 갈구하기도 하다가 결국 (영남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에 안주하게 됐고, 이는 보수정당의 영남 패권이 강화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영남 보수 패권주의, 영남과 충남 지역 보수화가 상당기간 한국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최근 6·13 지방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 뿐 아니라, 충남·충북·대전 지역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모두 승리하는 등 표심 변화가 큰 폭으로 일어났다. 정치권에선 “민주·개혁 성향이 강했던 부산·경남의 원래 표심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3당 합당 이후 왜곡된 이들 지역의 표심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지역으로 국민을 나누는 지역주의 정치, 색깔론으로 국민을 편 가르는 분열의 정치는 끝나게 됐다”고 평가했다.

지역주의 구도를 균열낸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 한국 정치는 ‘3김 시대’ 마지막 남은 주인공인 김 전 총리의 퇴장을 지켜보게 됐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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