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016년 8월19일 오후 서울 중구 청구동의 자택을 찾은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과 환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3김 시대’의 한축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중앙정보부 창설자’를 비롯해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 등 그에게 따라붙는 여러 꼬리표가 삶의 부침을 드러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쿠데타를 주도하며 정치 전면에 등장했지만 내부 권력다툼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고,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혀 야인 생활을 보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도입된 대통령 직선제는 ‘3김’을 한국정치의 전면으로 끌어올렸지만, 본인은 대권과 인연이 없었다.
■ 5·16 쿠데타로 정치전면에 나서다
1926년 1월7일 충남 부여군에서 아버지 김상배씨와 어머니 이정훈씨 사이 7남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2인자로서의 삶은 35세 때인 19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군 중령이던 그는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한국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같은해 창설된 중앙정보부 부장에 취임했고, 1963년 공화당 창립을 주도했다.
창당과정에서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및 파친코 사건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당시 “신악”으로 불린 이들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면서 정권 내부의 권력다툼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1963년 2월 여론무마를 위해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남을 남긴 채 첫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곧 귀국해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고향 부여에서 당선된 뒤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의 쟁점이던 대일청구권 문제와 관련한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알려진 뒤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6.3시위가 터졌고, 시국수습책의 하나로 1964년 2차 망명길에 오른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으나 1968년 농민복지회 사건으로 당의장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 1969년 박정희에 의해 추진된 3선개헌에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결국 참여했다. 이후 1971년부터 75년까지 4년6개월간 국무총리를 재임했다. 박정희 정권의 ‘개국공신’이었지만, 정권 내내 끊임없이 견제받으며 정치적 부침을 이어갔다.
■ 1987년 민주항쟁으로 ‘정치적 부활’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당하고, 이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김 전 총리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1984년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6년 귀국해 13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87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는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을 당선시키면서 정치에 복귀했다. 여소야대 4당 체제에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며 무시 못할 정치적 위상을 유지했다. 1987년에는 13대 대선에 출마했고, 1990년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3당 합당에 참여해 민자당의 한축이 되고, 이어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원해 여권의 2인자역을 고수했다.
김종필 전 총리가 2015년 11월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한 뒤 김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 씨를 위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1995년 첫 시행된 지방선거에서 대전·충남·충북 등 충청권은 물론 강원도에서도 지사를 당선시키면서 중부권의 맹주로 떠올랐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도 자민련은 지역구 41석과 전국구 9석 등 총 50석을 확보해 민자당과 새정치국민회의에 이은 제3당이 됐다.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이념적으로 거리를 뒀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손을 잡아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이른바 ‘디제이피(DJP) 연합’을 깜짝 발표했다. 김대중 총재가 당선될 경우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초대 국무총리로 한다는 내용이 주된 것이었다. 결국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이후 국민의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를 맡게 됐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대북관계에 대한 이견이 심해지자 김대중 대통령과 갈등했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는 자민련이 17석만 얻어 원내교섭단체(20석) 구성조차 못하며 위기를 맞았다. 2001년 9월 자민련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반대하며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디제이피 연합은 무너졌다.
■ 정치적 내리막길…“정치는 허업”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에는 자민련은 더욱 왜소해졌다. 2004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한 노 대통령 탄핵에 동의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제17대 총선에서 지역구 4석만을 얻었다. 김 전 총리도 “선대위가 1번을 고집했다”며 비례대표 1번을 받아 10선을 노렸지만, 정당득표율 2.9%만 얻어 국회에 복귀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오늘로 총재직을 내놓고 정계를 떠나겠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또 “내가 일찍 떠날 수도 있었지만 뭔가 세워놓고 떠나려고 욕심을 부린 모양”이라며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며 내 나름대로는 완전 연소해 재가 되도록 탔다”고 감회를 밝혔다. 이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은 변했다”며 “노병은 죽지는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2007년 이명박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하는 등 간접적인 정치 활동에만 나섰다. 2008년 12월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자택 인근의 순천향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2012년 대선에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그의 아호를 딴 ‘운정회’ 창립대회가 열리는 국회를 방문했다. 그는 “저도 내일모레면 아흔이다. 이런 나이가 돼 돌이켜보니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왜 못했는지 후회막급이다”라며 “(죽으면) 국립묘지는 가지 않겠다. 조상과 형제가 누워 있는 고향(부여)에 가서 눕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회고록은 쓰지 않을 것이며 ‘영생의 반려자와 이곳에 함께 눕노라’는 비석만 하나 새겨놓았다”고 밝혔다.
그는 평생 정치적 굴곡을 겪으며 자신의 경험에서 발현된 ‘촌철살인’의 명언을 여럿 남겼다. 특히 지난 2011년 1월 신년인사를 온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 등 후배 정치인들에게 “정치는 허업이다.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여러차례 조언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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