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카페 앞에 모여든 시민들이 한 정치인의 이름을 연호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던 300여명의 촛불시민들이 입을 모아 부른 이는 이재명(52) 성남시장이다. “사이다!” “이재명!” “한 마디 해주세요!” 집회 뒤 늦은 저녁식사를 하던 이 시장은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거리에서 30여분간 즉흥연설을 펼쳤다. 치솟는 지지율에도 줄곧 ‘변방의 사또’로 불려왔던 그가, 명실상부한 대권주자로 대중의 뇌리에 새겨진 순간이었다. 이재명은 ‘탄핵정국’의 최대 수혜자다.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이 신중론을 고수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박 대통령의 퇴진과 탄핵을 외치는 그에게 대중의 관심이 쏟아졌다. 8월까지 2% 수준에 머물렀던 지지율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을 지나며 3~4개월새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압박하는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문(문재인)-안(안철수)’구도는 ‘문-이’구도로 다시 쓰였다. 지인들이 자꾸 묻는다. “이재명은 어때?”
변호사가 된 소년공…고시 동기들과 “사회변혁운동” 도원결의
많은 이들이 이재명에게서 노무현을 본다. 변방에서 일으킨 돌풍, 거침없는 언변 탓도 있지만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데서 두 사람의 걸어온 길이 겹친다. 이 시장은 노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자수성가해 대선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경북 안동의 산골마을에서 7남매의 넷째로 자란 이 시장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12살의 나이에 성남공단에서 소년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야구글러브 공장에서 일하다 프레스기계에 왼팔을 다쳐 장애를 얻었다. 건설노동자인 그의 맏형도 산재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 이 시장이 스스로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였다. 비주류였고 아웃사이더였으며 변방이었다”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 시장과 가까운 한 초선의원은 그의 삶이 곧 그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이재명은 자신의 삶에서 빈곤이나 고통이 체화돼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일자리를 잃은 이, 가난한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공감의 수준과 몰입의 강도가 다를 거다.”
가난한 집안을 꾸려가야 할 이 시장이 판·검사 대신 변호사가 되고, 결국 정치인이 되기까진 ‘친구를 잘못 만난 탓’도 컸다.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학생운동권 출신 동기(18기)들이 이재명을 눈여겨본 것이다. 문병호·최원식 전 의원(국민의당)과 정성호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그들이다. 정 의원은 “이재명은 개성이 강하고 명석했지만 대학에서 공부만 한 전형적인 고시반 출신이었다”고 돌이켰다. “똘똘한 이재명이 공안검사가 되는 걸 막으려고 ‘의식화’를 했다”는 우스개도 있다. 20여명의 동기들이 “판·검사를 하지 말고 변호사가 돼 사회변혁운동에 뛰어들자”며 ‘도원결의’를 이뤘다. 나중에 이 시장은 “27살 새파란 나이에 판·검사 발령 안 받고 그런 용기를 얻게 된 것도 동기들 덕이었다”고 회고했다.
품격 없다지만 갈증도 없다
막말과 직설의 수위 조절은 쉽지 않다. 종이 한 장 차이다. 이재명 시장은 수위를 넘나들며 에스엔에스(SNS)상에서 팬과 안티팬을 동시에 양산해왔다. 스스로 “홍준표 경남지사와 박근혜 대통령은 나의 홍보대사”라고 자랑할 만큼 ‘노이즈 마케팅’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로 직설이 필요한 계절이 찾아오면서 이재명의 직설은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정치인 소수에게 국한됐던 팬덤이 확산됐다. “박근혜는 청와대를 나오는 순간 수갑을 채워야 합니다.” “머슴(정치인)들이 간이 부었어요.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주인(국민) 알기를 개떡으로 알게 됐어요.”“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한 이들), 그거 미친 인간들 아닙니까.” 여과없이 내놓은 언어들은 대권주자의 ‘품격’은 없지만 분노한 시민들의 갈증을 달래주기엔 충분했다.
갈등 국면을 이용해 성장한 정치인이 한 나라를 아우르는 대통령이 되기에 충분할까. “대통령이 되면 이재명이 제일 잘할 거라고 확신한다”고 말하는 한 민주당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재명한테는 우리 진영이 갖고 있는 ‘착한사람 컴플렉스’가 없다. 우리가 참여정부 때 왜 구태를 청산하지 못했느냐면 나쁜 놈들을 착한 방식으로 바꿔보려 해서 그런 거다. 평검사와의 대화로 검찰개혁을 할 수 있나.” 개혁은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광장의 연설에서 그를 ‘재발견’한 사람 늘어
그럼에도 몇몇 지인들은 ‘말하기’보다 ‘들어주기’를 이 시장의 장점으로 꼽기도 했다. 정성호 의원은 “이 시장은 검정고시를 거치는 등 다른 길을 걸어온 만큼 이해하기 쉬운 대중의 화법을 구사한다.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도 강점이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귀기울이고 반응하곤 한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스킨십하길 즐기는 편이다. 대선주자들이 정치부 기자들과 각각의 일정을 공유하기 위해 만드는 메신저 대화방에도 ‘선수’가 직접 들어와 참관하는 경우는 이 시장이 유일하다. 최근까진 거의 모든 페이스북 댓글에 ‘좋아요’를 눌러주기도 했는데, 그러다 문재인 전 대표를 비방하는 악성댓글에 ‘좋아요’를 눌러 맹비난을 들은 일도 있다.
최근 광화문광장 연설 등을 통해 중앙정치 무대에 설 일이 늘면서 이재명의 ‘말’을 재발견하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정적을 공격하는 수준을 넘어 정치·경제·사회 각 영역에 대한 내공이 기대 이상으로 탄탄하다는 평가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재벌을 비롯해 경제구조를 비판하는 이 시장의 거리연설을 본 뒤에, 티 안나게 뒤에서 이 시장을 돕고 싶다는 교수들이 여럿 연락이 왔다”고 전했다. 국민의당의 한 의원은 “링컨 대통령도 철학은 나중에 생긴 것이지, 토론과 대중연설을 잘해 상대편을 통쾌하게 이긴 정치인이었다. 지금 대선주자 중에 1~2시간의 대담이나 토론이 가능한 주자는 이재명뿐”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9일 오전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민주종편TV에 출연해 시청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트럼프건 샌더스건 검증은 혹독
그럼에도 변방의 사또는 아직 중원에서 낯선 존재다. 이재명에게서 버니 샌더스를 발견하여 열광하는 이들이 있고, 도널드 트럼프를 발견하여 증오하는 이들도 있다. 지난달 미국의 블룸버그통신도 이 시장에 대해 “그는 도널드 트럼프 차기 미국 대통령을 존중하는 한편, 버니 샌더스와 비교되는 것도 좋아한다”는 양면적인 평가를 내놨다. 그가 실제로 트럼프에 가깝건 샌더스에 가깝건, 대선까지 가기 위한 검증과정은 이 시장에게 특히 혹독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이나 서울시장 선거 등 큰 선거에서 검증을 거친 다른 주자들과 달리 이 시장은 유독 ‘구설’이 많아서다.
사이다 발언은 여전히 그에게 양날의 칼이다. ‘탄핵정국’이 마무리되고, 안정적인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대선정국이 열리자마자 이 시장은 ‘석사논문 표절 의혹’과 ‘이름도 잘 모르는 대학’발언으로 입길에 올랐다. 석사논문 표절 의혹이 제기되자 학위를 받은 가천대를 두고 “저는 중앙대를 졸업했고 사법시험을 합격한 변호사인데, 제가 어디 ‘이름도 잘 모르는 대학’의 석사 학위가 필요하겠냐”고 말한 것이다. ‘학교 비하 발언’ 논란이 일자 이 시장은 거듭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국민적 관심을 받는 대권주자의 사려깊지 못한 발언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 시장이 이같은 ‘실언’의 빈도를 낮추지 않는 한 대권의 꿈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시장 쪽은 직설이 정치적 전략에 입각한 것이기에 대선 국면에선 자제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벼룩이 소처럼 걸으면 눈에도 안 띈다. 그런데 소가 벼룩처럼 뛰면 미친 소밖에 더 되겠느냐”는 설명이다. 기초단체장으로서 입소문을 낼 때와, 대권주자로서 지지를 늘려갈 때는 ‘체급’에 따라 전략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장은 거침없이 내뱉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일관된 원칙들을 지켜온 것으로 보인다. ‘내부 총질은 안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번 탄핵정국에서 집권여당, 청와대를 향한 그의 공격은 사나웠지만 민주당의 미온적 걸음이 야권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을 때는 내부를 향한 비판을 삼가고 오히려 지지의 글을 남긴 바 있다.
‘어딘지 불안하다’ 우려 씻을 수 있을까
촛불민심을 타고 날아오른 이재명 시장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여의도 정가에선 아직도 트위터 정치인, 재선 기초단체장에 불과한 이 시장의 인기를 얕잡아 보는 기류가 강하다. “사이다 거품은 쉽게 빠진다”는 평가다.
이 시장에게 여의도의 뒷배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에겐 문 전 대표나 안희정 충남지사에게처럼 적극적인 지지를 드러낸 의원이 없다. 2007년을 전후해 당의 부대변인을 맡은 게 여의도 경력의 전부여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시장이 바람을 타기 시작한 것은 조직이 붙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2008년 대선을 앞두고 이 시장이 대표로 활동했던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정통들)’ 인사들이 그를 돕고 있어서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정통과 호남의 반문재인 세력, 정의당 지지자 등 기존의 민주당에 실망한 이들이 이 시장 쪽을 지지하고 있는 걸로 안다”고 설명했다. 국회에서도 손학규 전 고문이 탈당하고 이 시장의 지지율이 올라가면서 문 전 대표를 지지하지 않는 비주류들이 이 시장 쪽을 곁눈질하는 분위기다. 이 시장 쪽은 민주당 경선 룰을 바꿔 ‘결선투표’를 치르게 되면 ‘비문연대’를 통해 승부를 내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선대위원장으로 대선을 치러본 경험이 있는 야권의 한 의원은 “호남에서 이 시장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있는 데다 티케이(TK) 출신이고, 수도권에서 단체장을 한 만큼 경선만 넘기면 이 시장의 당선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지방선거 때마다 불거졌던 각종 스캔들은 대선에서 복병이 될 수 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셋째 형 부부와의 다툼을 담은 ‘욕설 녹취록’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장이 장문의 해명글을 올린 바 있지만 경위를 불문하고 가족과의 불화가 대선주자에게 도움이 될 리는 없다. 이 시장의 셋째형은 ‘박사모’의 성남지부장도 맡고 있다.
‘이재명으론 어딘지 불안하다’는 우려를 그가 불식시키지 못하면 경선의 벽을 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시장은 자신을 둘러싼 구설들을 정면 돌파하길 택하는 쪽이다. 지난 8일 국회 앞에서 연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토크쇼에서도 “형 만한 아우 없다는 건 진리”라며 선배인 박 시장을 추어올린 뒤 “우리 셋째 형님만 빼고”라고 눙치기도 했다. 대선에서 이런 약점들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될지를 두고는 측근들의 의견도 엇갈린다.
한 의원은 “진실과 무관하게 전국선거인 대선인 만큼 지방선거 때와 비교가 안되는 도덕적 타격을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다른 의원은 “최순실게이트 이후 정국은 통상적 선거를 치르는 국면이라고 볼 수 없다”며 “통상적 선거라면 미세한 검증에 영향을 받겠지만, 이번 선거에선 나라의 근본적인 틀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만큼 사소한 개인사들이 판을 흔들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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