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민성철 부장판사)는 고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21일 각하됐다.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소송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1월 같은 취지의 소송에서 법원이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과 상반된 결과다. 일제의 반인도적 범죄에 책임을 묻고 실질적 정의를 세우려 한 지난번 판결과 달리, 이번 판결은 국제관습법 등 형식적 요건에 매몰돼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국내 법원이 다른 나라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국가면제’ 법리다. 앞선 판결에서는 ‘위안부’ 강제 동원과 같은 ‘반인도적 범죄’는 국가면제 법리의 예외라고 밝힌 반면, 이번 재판부는 국제사법재판소의 다수 의견에 기대어 이런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관습법은 강자가 지배하는 국제질서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루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법원도 나치 독일의 자국민에 대한 인권유린 행위에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렸지만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독일에 패소한 바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인권과 정의를 점점 더 보편적 가치로 인식해가고 있는 만큼 각국의 노력이 더해지면 국제관습법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번 재판부는 간과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국제법의 형식적 틀에 갇힐 게 아니라 우리 헌법과 국제인권법이 최고의 가치로 선언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비춰 판단해야 한다. 재판부는 헌법의 국제법 존중 원칙은 강조하면서도 피해자들의 존엄성 회복은 경시한 것 같다. ‘외교적 굴욕’인 박근혜 정부의 12·28 합의를 피해자에 대한 권리구제 수단으로 평가한 대목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재판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은 한국과 일본 정부의 대내외적 노력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를 봐서는 공허한 이야기다. ‘위안부 기록’의 세계기억유산 등재마저도 일본의 요구로 최근 유네스코 규정이 바뀌면서 무산 위기를 맞았고, 일본 역사교과서는 1993년 ‘고노 담화’를 내팽개치며 ‘위안부’ 강제성 서술을 지워버리고 있다. 인간성을 짓밟은 전시 성폭력이라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국제사회와 역사에 각인시키려면 외교 노력뿐 아니라 사법적 평가도 선명해야 한다. 사법부가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역할을 되새기며 상급심을 통해 이번 판결을 바로잡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