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주한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주한미군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무급휴직 통보를 규탄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코로나19로 힘겨운 시기에, 주한미군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노동자 4000명이 끝내 강제 무급휴직의 막막한 길로 내몰렸다. 한국 정부의 방위비 분담금을 지난해의 5배나 올리라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무리한 요구가 결국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 주둔 70년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으니 안타깝고 어이가 없다.
미국은 그동안 무급휴직의 파국을 피하려는 한국 정부의 제안을 계속 외면해왔다. 정은보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 대사는 31일 “우리 국방 예산에 편성되어 있는 방위비 분담금 인건비 예산을 우선 집행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안해놓은 상황”이라며 주한미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급휴직 강행을 통보한 데 유감을 표했다. 앞서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을 우선 부담할 테니, 인건비·군수지원비·군사건설비 3개 항목으로 구성된 방위비 분담금 협상 가운데 인건비부터 타결하는 양해각서(MOU)를 쓰자는 제안도 내놓았으나 미국은 거부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을 볼모 삼아 방위비 대폭 인상을 관철하려는 의도로밖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그러면서 동맹과 인권을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노무 조항에 따라 주한미군에 고용된 한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해 더욱 막막해하고 있다. 파업권이 제한되고 휴직수당도 받을 수 없다. 주한미군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함께 갑시다”(Let’s go together)란 구호를 외쳐왔지만, 무급휴직을 강요당한 노동자들은 이 말에 더욱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한국 정부는 우선 기약 없는 무급휴직으로 생계를 걱정하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길 바란다. 그러나 방위비 협상에서는 미국의 부당한 압박에 결코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담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미국은 무급휴직을 당장 철회하고, 터무니없는 인상 요구를 접는 게 동맹의 정신에 부합하는 일임을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무리한 요구에서 촉발된 이번 무급휴직은 ‘공정한 동맹’과는 거리가 먼 현실을 다시 실감하게 한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한-미주둔군지위협정과 방위비 분담금 사용의 불공정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