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현의 ‘몫’] 조기현 ㅣ 작가
팬데믹 시대에 축제를 준비 중이다. 축제 이름은 ‘생태문화축제’로, 이번 주말 이틀간 열린다. 지금 우리는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고, 그로 인해 어떤 위기가 닥쳤는지 여실히 느끼고 있다. 이런 시기에 ‘생태문화’를 기획하려니 고민이 깊어진다. 관객들과 어떤 공동의 감각을 나눠야 할까?
생태문화축제는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다. 이곳의 슬로건은 “석유에서 문화로”다. 문화비축기지로 바뀌기 전 석유비축기지였기 때문이다. 문화비축기지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면서 성장했던 산업화 시대의 유산인 셈이다.
내가 축제에서 맡은 섹션은 ‘노동’이다. 우리에게 노동이라는 단어는 공장과 건설로 대표되는 산업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석유에서 문화로’를 외치는 공간에서 노동을 다룬다는 건, 산업화 시대의 노동을 벗어나 새롭게 노동을 감각하자는 제안이다.
팬데믹은 인간이 자연을 무한한 자원으로 삼아왔기에 벌어진 위기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관계는 인간의 노동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노동은 자원을 캐고 화석 연료를 사용하며 상품을 생산했던 노동이다. 팬데믹과 기후 위기는 더 이상 자연을 착취하는 노동이 유효하지 않다는 걸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사라지는 산업의 노동을 친환경 노동으로 전환하는 ‘정의로운 전환’이 논의된다.
하지만 이번 축제는 조금 다른 주제를 다룬다. 노동을 생태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고른 주제는 ‘돌봄’과 ‘아픈 몸’이다. 각각 주제로 토요일, 일요일에 패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프로그램 제목은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 돌봄과 아픈 몸의 노동권을 위한 대화’이다.
이제까지 노동은 ‘건강한 몸을 가진 남성 생계부양자의 생산 노동’을 표준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돌봄은 가정 내 여성이나 약자에게 맡겨져 밥벌이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자본은 건강한 몸만이 할 수 있는 노동 강도와 시간을 요구했다. 생산물을 만들지 않는 ‘돌봄’과 생산력을 담보하지 않는 ‘아픈 몸’은 이윤을 창출하지 않기에 배제된다. 프로그램의 제목이 김남주 시인의 시구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인 이유는 돌봄과 아픈 몸이 ‘태초’부터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맥락이 있다는 직관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왜 ‘돌봄과 아픈 몸의 노동권’일까?
‘가장’인 남성이 생산 노동을 하려면 여성이 가정에서 공짜로 가사와 돌봄을 해야 한다. 반대로 말해, 돌봄 노동이 없다면 생산 노동도 없다. 바로 이런 속성이 돌봄과 자연의 연결점이다. 돌봄과 자연은 생산 노동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영원한 공짜 취급을 받는다.
돌봄과 자연은 영원하지 않다. 돌봄을 하는 여성 혹은 약자, 자연의 희생으로 유지될 뿐이다. 돌봄과 자연의 연결점은 돌봄이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노동이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점에서 잘 돌보고 돌봄받는 ‘돌봄 사회’와 탄소중립 사회로 전환하려는 ‘그린 뉴딜’이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아픈 몸’은 일터에서 차별받거나 배제되기 일쑤다. 하지만 노동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 이상이다. 노동은 삶의 한 종류이고, 사회와 관계 맺는 것이며, 성취를 얻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몸뿐 아니라 다양한 몸의 노동권을 어떻게 보장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사회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불안정 노동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일하는 시민’ 모두를 포괄하는 새로운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 노동권의 새로운 보편을 만드는 과정에서 돌봄과 아픈 몸의 자리를 함께 논의하면 어떨까? 노동, 돌봄, 아픈 몸, 생태에 대해 더 많은 이들과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번 주말에 열리는 생태문화축제가 그 시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