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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기현의 ‘몫’] 서로 살피고 달래는 맛

등록 2023-06-11 18:50수정 2023-06-12 02:3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조기현 | 작가

“어머니가 오늘 퇴원했는데, 병원 밥은 통 안 드시더니 여기선 식사를 잘하네.”

백반집에서 밥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다. 뒷자리에서 중년 여성과 노년 여성이 ‘오늘의 백반’을 먹고 있었다. 노릇하게 구운 고등어와 콩나물국, 여섯가지 찬이 차려진 밥상 앞에서 노년 여성은 밥 한그릇을 다 비워가는 중이다. 밥 한술 뜨고, 고등어 살점 떠올리고, 반찬을 입에 가져가서 꼭꼭 씹는 모습 하나하나에 괜히 나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퇴원 뒤 되찾은 기운이 나에게도 전해진달까. 사장님도 연신 다행이라고, 밥 더 드시라고 말하며 웃어 보인다. 안도감과 보람 틈에서 먹은 그날의 점심은 온종일 기분을 좋게 했다.

그곳의 메뉴는 생선 백반과 김치찌개, 된장찌개, 제육볶음 같은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모든 메뉴가 맛이 좋다. 내가 제육볶음을 시켜 먹을 정도다. 사실 나는 지난 몇년 동안 내 의지로 내 돈을 주고 제육볶음을 시켜 먹은 적이 없다. 군대를 대신해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한 3년 내리 공장에서 제육볶음만 나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릴 때 매일 찐 감자만 먹어서 감자를 쳐다보지 않는 것, 영화 <올드보이>에서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몸서리치며 이입하게 된 것도 다 그 경험 때문이다.

제육볶음의 기름지고 달고 매운 양념 맛은 공장에서 군대 안 간 놈으로 찍힌 멸시를 되살리고,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 중 다수를 차지한 몽골인이 제육볶음 다 먹는다고 난리치던 공장장의 적대감이 떠오른다. 야근과 철야를 반복하던 노동의 기억은 덤이다. 버티고 살아남자는 마음뿐인 때였다.

그런데 백반집은 제육볶음을 내 입으로 시키고 내 손으로 입에 가져가게 한다. 소집 해제 뒤 8년 만이다. 정말 맛있지만, 어쩌면 맛과 함께 그 맛이 자리한 백반집의 몫도 큰 것 같다. 나는 늘 오후 1시를 넘겨 점심을 먹는다. 11시쯤에는 근처 건설 현장의 인부들이 자리를 채우고, 12시쯤에는 직장인들이 자리를 채운다. 그 시간대 나 혼자 가면 조금 미안해진다. 테이블 여덟개밖에 없는 곳인데, 나 때문에 셋, 넷씩 오는 손님들을 돌려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이후 점심은 정규적인 노동을 하지 않는 이들의 시간이다. 근처 종합병원에서 오전 시간을 진료에 다 쏟아부은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보호자들도 많고, 근처 고시원에 사는 아저씨들도 하나둘 나타난다. 정신없이 밀려들던 사람들이 빠져나가니 두 사장님도 여유롭다. 주방 사장님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어 누가 어떤 반찬을 잘 먹는지 보면서 더 퍼준다. 홀 사장님은 오는 이들 한명 한명에게 안부를 묻는다. 치료는 잘 진척되는지, 지난번에 구한다던 일은 구해졌는지, 어디 누가 묻지 않으면 말하기 힘든 근심거리를 덜어주는 듯한 말이다.

그런 말이 각자의 고립감을 달래는 대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와 같은 시간에 자주 밥을 먹는 한 중년 남성은 사장님을 붙잡고 오늘의 반찬 이야기부터 고시원 이웃들의 근황까지 다 이야기한다. 사장님이 잘 들어주기도 하지만 할 일 있을 때는 적당히 끊는다. 관심의 정도나 관계의 거리감 모두 간을 잘 맞춘 듯한 균형감이 있다.

사장님의 모습에 공동체에서 내 모습을 대입해본다. 조금 까칠한 것 같기도 하고, 관심이 없을 때는 많이 무심한 것 같기도 하다. 허기를 없애기 위해 끼니를 해치우는 게 전부였던 나에게 이제 밥 먹는 시간이 조금 달라졌다. 품을 내고 몫을 나눈다는 것이 그저 소망에만 그치지 않고 자족적인 생각에만 머물지 않도록 살고 싶은 기운을 준다. 나에게 제육볶음은 멸시와 적대의 맛에서 서로 살피고 달래는 맛이 되어 가는 듯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사장님이 꼭 말을 건다. “삼촌, 밥 더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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