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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찬수 칼럼] 김일성 회고록이 일깨운 것

등록 2021-05-12 14:21수정 2021-05-26 15:14

국가보안법이 ‘낡은 유물’이 된 건 사실이다. 이젠 누구도 보안법을 입에 올리지 않고, 보안법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전처럼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일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김일성 회고록 논란에서 보듯 언제든지 우리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손쉽게 제약할 수는 있다.
박찬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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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일대기와 사상을 담은 글이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며 은밀하게 나돌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대학생들도 김일성의 항일 투쟁이나 주체사상엔 눈을 돌리지 않는 시대다. 오직 현 정부의 이념 성향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레토릭으로 일부 보수 언론과 단체에서 ‘주사파’라는 단어를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얼마 전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가 국내에 출판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저런 책을 출판한 이는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세기와 더불어>는 북한에서 펴낸 것과 똑같이 8권 1세트로 구성돼 있다.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 4월부터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까지 일대기를 담고 있다. 분량이 적지 않고, 파장 역시 만만치 않다. 교보문고 등은 ‘책 구매자가 처벌받을 수 있기에 고객 보호 차원에서’ 책 판매를 중단했다. 어느 보수 단체는 ‘대한민국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이유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김일성 회고록을 지금 펴낸 것도 뜻밖이지만, 판매 중단과 법적 제소 역시 뜬금없는 일이다. 보수 진영이 모두 회고록 출판에 경악하는 건 아니다. 하태경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미사여구를 동원했다고 해서 우상화 논리에 넘어갈 국민은 없다. 국민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더 적극적으로 보장하자”고 페이스북에 썼다.

김일성 회고록을 출판한 이는 82살의 김승균씨다. <사상계> 편집인이던 1970년, 김지하 시인의 ‘오적’을 사상계에 실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다. 지금 시기에 이 책을 펴낸 이유를 묻자, 김씨는 “여러 가지 형편이 어려워 (출판) 사업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항일운동 가운데 좌파 항일운동은 소외되고 있어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고 답했다. 이 책이 김일성을 미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겠냐는 질문엔 “그런 건 당연히 있겠지. 회고록이니까 자기중심적으로 썼을 거다. 그러나 축지법을 쓴다든지 하는 허무맹랑한 얘기는 안 나온다”고 말했다.

나에게 <세기와 더불어> 출판의 의미는 김일성 항일 투쟁을 찬양했는지 여부보다는 조금 다른 데 있다. 잊고 지냈던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다시 일깨운 의미가 더 크다. 이 책의 출판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한 국가보안법 7조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일부 보수 언론·단체에서 “국가보안법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것”이라 비난하고 심지어 “회고록 출간은 국가보안법을 없애려는 현 정권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건 이에 기반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특히 2, 3, 4, 7, 10조는 민주주의 기본 전제인 죄형법정주의에 반하고, 양심·언론·출판·집회·결사·학문·예술의 자유 등 기본적 자유와 권리에 대한 침해 소지가 있다”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한 게 2004년의 일이다. 그 직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은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다.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나”라고 말해 격렬한 논란을 불렀다. 이 논란의 여파는 오랫동안 이어져, 보안법을 없애자는 주장을 선뜻 꺼내기 힘들게 했다.

국가보안법이 ‘낡은 유물’이 된 건 사실이다. 이젠 누구도 보안법을 입에 올리지 않고, 보안법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집계한 통계를 보면, 김대중 정부 때만 해도 5년 동안 1천명을 넘던 구속자 수는 노무현 정부에서 161명으로 크게 줄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각각 114명, 100명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선 2018~2019년 2년간 4명이 구속됐을 뿐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일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김일성 회고록 파문에서 보듯 언제든지 우리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손쉽게 제약할 수는 있다. 지난해 5월엔 진보정당 행사에서 ‘혁명동지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확정판결을 받아, 경기도 파주에서 세번이나 뽑힌 기초의원 안소희씨가 의원직을 상실했다.

북한 정권에 대한 젊은층의 혐오가 커지고 과거의 공포는 사라진 마당에, 굳이 ‘소모적인 논란’을 또다시 부를 필요가 있냐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가 없는 법’이라면, 없는 게 맞다. 어느새 국가보안법의 존재에 무감각해진 내 모습을 김일성 회고록 논란에서 돌아본다.

선임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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