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방이 국내 출간한 <세기와 더불어> 1권 표지. 사진 민족사랑방
고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전 8권, 이하 ‘김일성회고록’) 국내 출간·판매를 둘러싼 논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국내 출간 뒤늦게 확인돼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92145.html#csidx886ef1c591a644f8694834e7d91b2ae )이 이전과 달라진 한국 사회 내의 의미심장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돌출적으로 발생한 이번 사태가 북한 언론·출판물의 완전 개방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대표적인 변화 움직임은 제1야당인 국민의힘 쪽에서 나왔다. 대법원이 ‘이적표현물’로 판단한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출간·판매·구매 행위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지 말고 ‘그냥 두자’고 한 것이다. 국민의힘은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 수호자’를 자처해온 정치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터라, 이런 전향적 반응은 역사적 선례에 비춰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다. 정부와 집권당은 국민의힘 등 보수 쪽이 호응만 한다면 북한 언론·출판물 개방 조처에 부정적일 이유가 없다.
국민의힘 쪽의 전향적 태도의 물꼬를 연 것은 19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인 하태경 의원이었다. 하 의원은 김일성회고록 국내 출간 사실이 처음 언론에 보도된 짓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김일성회고록에 속을 사람이 어딨나. 높아진 국민의식 믿고 표현의 자유 적극 보장하자”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하 의원은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통제해야 한다는 건 국민을 유아 취급하는 것”이라며 “이제 국민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보다 적극 보장합시다”라고 제안했다. 아울러 “우리가 북한 책 금지하면 한류 금지하는 북한 비난할 자격이 있겠습니까”라며 “북은 한류 금지하더라도 우리는 북한 출판물 허용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과시합시다”라고 덧붙였다. ‘국민의식’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자’는 주장이다.
하 의원의 물꼬 트기는 국민의힘의 공식 견해로 발전했다. 박기녕 국민의힘 부대변인 명의로 22일 “김일성이 주인공인 허황된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제목의 공식 논평을 내놓은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 논평에서 이번 김일성회고록 국내 출간이 “북한에서 하는 허황된 김일성 우상화의 실체를 깨닫게 해줄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며 “대한민국 국민의식과 체제의 우월성을 믿고 국민에게 판단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국민의힘의 공식 견해가 김일성회고록 출간·판매·구매 행위를 국가보안법으로 규율하지 말고, ‘그냥 두자’로 정해졌다.
전과 다른 제1야당 국민의힘의 적극적·전향적 행보와 달리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26일까지 김일성회고록 국내 출간과 관련한 공식 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다. 국가보안법 개폐에 적극적인 민주당의 이런 조심스런 대응은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이념 공방의 휘발성을 의식한 의도적 ‘침묵’이라 할만하다.
집권당인 민주당이 ‘침묵’을 택했다면, ’침묵’이 불가능한 정부는 ‘조심스런 관망’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는 “출간 경위 등을 살펴서 통일부 차원에서 취해야 할, 취할 수 있는 조처가 있는지 검토하겠다”는 지난 22일 통일부 당국자의 익명 논평 이후 눈에 띄는 후속 반응이나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종주 통일부 대변인은 26일 기자회견에서 “시민단체 등이 회고록의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고, 경찰도 관련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통일부 차원에서 추가로 취해야 할 조처가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행정 주체인 정부, 입법권을 지닌 집권당과 제1야당이 이전과 달리 전향적이거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면서, 평지돌출한 이번 김일성회고록 출간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북한 언론·출판물 완전 개방으로 물꼬를 트는 마중물 구실을 할지 주목된다.
지난 1일 ‘도서출판 민족사랑방’(대표 김승균)이 김일성회고록을 국내 출간한 사실은 21일 저녁 <연합뉴스>를 통해 처음 보도됐다. 교보문고·예스24·알라딘 등 국내 대표적 온라인 서점을 통해 판매가 시작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이 일었다. ‘사단법인 법치와자유민주주의연대’는 “김일성은 전쟁범죄·반인도범죄자”라며 24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이 책의 판매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서를 냈다. 여기까지는 그동안 이런 류의 논란 때 늘 봐온 익숙한 반응이다.
논란이 가열되자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는 25일 “고객 보호”를 명분으로 판매 중단 방침을 밝혔다. “대법원이 이적표현물로 판단한 책을 산 독자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고객 보호 차원에서 신규 주문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다만 교보문고 쪽은 “정치적인 이슈나 판단과 무관하게 고객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조치”라며 “법원이나 간행물윤리위원회의 판단이 내려지면 이에 따라 신규 주문 재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교보문고의 판매 중단은, 김일성회고록을 ‘이적표현물’로 판단한 2012년 7월 대법원 판결을 의식한 조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김일성회고록 등 ‘이적표현물’이라는 법원의 판단이 내려진 북한의 언론·출판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건 아니다. ‘이적표현물 소지’ 처벌 규정인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 등)는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동조하는 (이적)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자”를 ‘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요컨대 “이적행위를 할 목적”이 증명돼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다. 실제 대법원은 2015년 11월, <노동신문> 기사를 개인 블로그에 비공개로 올리고 <김일성 선집 1권> 등을 갖고 있다는 혐의로 기소된 시나리오 작가의 사건과 관련해 “이적 행위를 할 목적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무죄 판결했다.
헌법재판소도 2018년 4월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9명 가운데 5명의 ‘다수 의견’으로 “유포·전파행위 자체를 처벌함으로써 이적표현물의 유통 및 전파를 충분히 차단할 수 있으므로 그 단계에 이르지 않은 소지 행위를 미리 처벌하는 것은 과도한 규제”이자 “반대자나 소수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오남용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당시 헌재는 이런 이견이 위헌 결정 정족수(6명)에 이르지 못해, 이적표현물 소지죄에 자격정지를 병과하는 위헌이라며 제기된 헌법소원 사건에서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 등)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 해석에 관한 한 최고 권위를 지닌 대법원과 헌재의 달라진 해석 경향도 북한 언론·출판물의 완전 개방으로 가는 시간이 그리 멀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징후로 볼 여지가 있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