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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프로파일러 이수정] 살인의 ‘사유’를 모르겠다는 이춘재의 말

등록 2020-11-12 15:20수정 2020-11-13 12:57

이수정 l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화성연쇄살인은 이제 더 이상 미제가 아니다. 14건에 이르는 살인과 20여건에 달하는 성범죄를 모두 본인이 저질렀다고 증언한 이춘재의 등장 때문이다. 며칠 전 베일 속에 가려졌던 이춘재의 법정 진술이 있었다. 아쉽게도 화성연쇄살인사건 때문이 아니라 이춘재의 8차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수십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윤아무개씨의 재심 재판 때문이었다.

이춘재의 법정 진술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바로 강간살인의 이유를 물었던 박준영 변호사의 질문에 대한 이씨의 답변 내용이었다. “왜 그런 (연쇄)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이춘재는 “지금 생각해도 당시에 왜 그런 생활을 했는지 정확하게 답을 못 하겠다”고 말했다. 더욱이 “계획을 하고 준비를 해서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고 당시 상황에 맞춰 (살인을)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고 진술하였다. 바로 이 대목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는데, 과연 한번도 아닌 자그마치 14번이나 되는 강간살인의 이유를 스스로 모를 수 있을까? 차라리 ‘악마에 이끌려서’ 또는 ‘성적인 욕망 때문에’라고 답변을 하는 것이 솔직했을 것이다. 더욱이 스스로의 범행동기에 대한 진술 중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고”라는 어구는 생뚱맞기까지 하다. 일반적인 구어체에서 ‘이유’가 아닌 ‘사유’라는 어휘를 사용하는가? 적어도 필자만큼은 너무 현학적인 냄새가 나서 대화 중에는 쓰지 않는 단어인 것 같다. 문맥에 맞는 내용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어구를 보태기까지 한 데는 아마도 계획범죄는 아니었다는 입장을 피력하려는 목적 때문인 듯하다.

범죄학 이론 중 중화(neutralization) 이론이란 것이 있다. 범죄자들 역시 관습적인 방식으로 비치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다양한 ‘물타기’ 수법을 쓴다고 알려진다. 데이비드 마차와 그레셤 사이크스는 범죄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택하는 다섯 가지의 중화 기술로는 ①책임의 부인 ②가해의 부인 ③피해의 부인 ④피해자에 대한 비난 ⑤상위 가치에의 호소가 있다고 소개하였다. 예를 들자면 사기범이 피해자의 탐욕을 비난하려 들거나 성폭력범이 피해자의 술버릇을 지적하는 등의 논리이다. 즉 피해자를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이 스스로의 고의보다는 상황적인 요인, 나아가 피해자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경우에 따라서 금전만능주의를 탓하거나 문란한 성문화를 자신의 범죄 ‘사유’로 지적하기도 한다. 이에 더불어 자신이 오히려 억울한 입장이라는 주장까지 듣다 보면 소위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수형자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던 초기에는 혼동스러운 시기도 있었다. 워낙 거짓에 능수능란한 사람들이다 보니 실제 억울한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이야기에 정성껏 귀 기울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입보다는 사건 기록 혹은 주변인들의 진술에 더 귀를 기울인다. 이춘재의 범행동기는 고스란히 그가 야기한 사건들의 현장에 각인되어 있다. 피해자의 성기에 삽입된 이물질들이 오히려 이춘재의 입으로 나온 범행동기에 대한 진술보다 더 정확하게 그의 추악한 행각이 왜 발생한 것이었는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상당한 시간이 흘러 그가 벌였던 사건 현장의 사진들도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법정 진술 속 도 넘는 뻔뻔함이 필자에게 피해자들의 고통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바로 이런 사실이 이춘재가 끔찍한 강간살인을 반복할 수 있었던 이유이리라. 내 책임은 하나도 없는, 상황 때문에 우연히 사유도 잘 모르는 일에 연루된 것일 뿐. 고통 속에 숨져간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대체 한 톨도 찾아볼 수가 없는 어이없는 진술이다. 다시금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는 진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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