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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수정의 프로파일러] 언제나 묻는 질문…“왜 지금에야?”

등록 2020-07-17 05:01수정 2020-07-17 19:46

이수정 ㅣ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왜 지금에야? 성범죄 신고가 있을 때마다 꼭 불거지는 일은 ‘왜 이제야 신고를 했느냐’ ‘애초 성적 침해가 발생했을 당시에는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의문은 성범죄 가해 행위의 태양이나 피해의 반복이 이뤄지게 된 경위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니 딱히 피해자가 주장하는 혐의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잠재된 질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 발만 더 나아가면 피해자에 대한 본격적인 2차 가해 행위가 되기도 한다. 즉 성적 괴롭힘이 애초 발생했을 때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니 사실상 ‘너도 좋았던 것 아니냐’는 식의 질문이 된다면 피해자에 대한 인신공격이 된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분명한 2차 가해 행위, 또다른 범죄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닳고 닳은 ‘꽃뱀’론이다. 신고인 혹은 고소인이 원래부터 인격적으로 신뢰하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비하함으로써 현재 제기되고 있는 혐의 내용의 근거를 뿌리째 흔들어 없애려는 시도다.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공격하라고 했던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의 발동인가? 이런 질문은 분명히 선을 넘은 것들이다.

이런 비난이 또 다른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진실은 잠시 밀어두더라도 오늘은 피해자들이 성적 침해가 있을 당시 왜 즉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우선 소위 성희롱과 같은 성적 괴롭힘이 시작되는 단계를 성범죄의 주요 구성요건인 폭력이나 협박으로 인식하는 피해자는 거의 없다. 일단 부적절한 행위가 용인된다고 판단하면 가해자는 그때부터 성인지 감수성이란 것의 작동을 마비시키기 시작한다. 인간이란 원래부터 매우 나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지판단은 일종의 선택적 과정이라 한 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점점 이 빠진 식칼처럼 날이 둔탁해진다. 이를 굳이 심리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체계적 둔감화’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말로 희롱하는 것이 받아들여진다고 생각되면 그다음 신체적 접촉이 시작된다. 슬쩍 실수하듯 스치며 아슬아슬한 느낌을 받게 되면 그다음에는 적극적이고도 고의적으로 신체 접촉을 한다. 피해자는 이때부터 심한 불쾌감과 공포심까지도 느끼게 되는데 이는 힘이 약한 동물을 학대해가는 과정과 진배없다. 위계나 위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언제라도 용인된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어서 끊임없이 인지적인 에너지를 쏟아부어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라도 쉽게 힘의 횡포에 함몰될 수 있다.

성희롱이라는 용어 자체가 갖는 오해의 소지, 즉 철저히 가해자의 용어라는 것 또한 함정일 수 있다. 애매하다면 애매하달 수 있는 이런 명칭은 피해자에게는 극도의 공포와 심지어는 자포자기를 유발할 수도 있다. 따라서 피해자에게는 이런 과정이 희롱이기보다는 성적인 괴롭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상급자 입장에서는 본인의 행위가 상대에게 심각한 괴로움을 유발할 만한 일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강간 사건에서조차 피해자의 항거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시그널이 피의자에겐 성관계에 대한 동의로 왜곡되어 해석되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나아가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에서조차 피고인 쪽이 재판 중 공포에 질려 아무 소리를 지르지 못한 피해 아동이 사건 당시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변명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어찌 같은 급의 얘기냐고 혹자는 물을 수도 있겠다. 영미법의 기준으로는 강간 또는 강제추행이나 성적 괴롭힘의 판단 기준이 언제나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피해자의 ‘동의’ 여부, 즉 피해자의 의사를 물어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분명 피해자도 좋아하는 것인지 아주 구체적이고도 명시적으로 물어보았다면 우리는 굳이 이런 논쟁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다. 본인의 의사에 반해 피해를 입게 된 모든 약자들에게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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