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ㅣ 책지성팀 선임기자
문학평론가에서 출발해 사상가로 나아간 가라타니 고진이 2003년에 발표한 논문 ‘근대문학의 종언’은 그의 고국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 특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 이젠 사라졌다”는 그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는 따로 따져봐야겠지만, 가라타니가 그 글에서 ‘종언론’의 유력한 근거로 한국의 문학평론가 김종철과 나눈 대화를 든 사실이 우리에게는 특히 흥미로웠다.
가라타니는 김종철이 문학을 떠나 생태 잡지 <녹색평론>을 발행하고 지역통화운동을 펼치던 2002년 가을 그의 초대로 한국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왜 문학을 그만두었는지 물었다고 한다. 김종철은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고 그에 대해 자신 역시 동감을 표했다고 가라타니는 소개했다. 김종철은 1999년에 행한 한 대담에서도 “문학에 대해 더 이상 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며, “우리 사회에서 문학은 더 이상 최전선에 있는 것 같지 않(고), 덜 절박한 자리에 있는 것 같다”고 그 까닭을 든 바 있다. 그런 문학을 떠나 그가 가장 절박하다고 생각한 생태 문제를 다루는 잡지를 발행하고 관련 단행본을 출간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지난달 25일 아깝게 숨을 거둔 뒤에도 문학평론가보다는 생태 사상가이자 운동가의 면모가 더 부각되고 평가받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고인과 문학 사이에 냉정하게 선을 긋는 데 대해서는 아쉬움과 회의가 남는다. 1999년에 낸 두번째이자 마지막 평론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서문을 “소년 시절에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 그였다. <녹색평론>에 매호 시가 실렸고 그가 마지막까지 어울렸던 ‘김밥 모임’(김종철 선생님과 밥을 먹는 모임) 구성원 대다수가 문인이었다는 사실도 문학을 향한 그의 여전한 관심과 애정의 징표라 믿고 싶다.
1999년 대산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을 읽어 보면, 그에게 시는 생태적 사유를 펼치고 만날 가장 유력한 수단임을 알게 된다. 그에 따르면 “시적 사유의 본질에는 어떠한 인공적인 조작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계의 근원적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이 내재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진정한 시인은 본질적으로 가장 심오한 생태론자일 수밖에 없”다. 그가 ‘시적 사유’라고 할 때 그것이 반드시 문학 장르로서의 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적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 누구나가 소유하고 있는 근원적 심성”이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시적 사유 또는 시적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모든 생명을 하나로 보는 사고방식”이 그가 생각하는 시적 사유 또는 시적 마음이다. 시는 “사물들 간의 내재적 친연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은유적 사고’에 주로 의존하는데, 그런 점에서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일부이며 만물이 우리의 형제라는 생태적 사유와 통한다는 것이다. “시인이란 본래 생명을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김종철 득의의 정의가 그에서 비롯된다.
이미 문학에 대한 흥미를 잃었노라고 밝힌 1999년의 대담에서도 그는 “어쩌면 시의 르네상스가 올지 모”른다는 희망 섞인 예측을 내놓는다. 시는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가장 쓸모가 덜한 장르인데, 그런 쓸모없음이 오히려 시의 활로가 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시는 아예 돈이 될 수 없는 물건이니까,” 오히려 정직하고 진실된 인간성의 표현으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시와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문학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것은 “굉장히 근원적”인 작용이다. 문학을 떠났다고 한 김종철이 <녹색평론>에 계속 시를 청탁해 싣고 문인 후배들과 교류를 이어 간 것은 시와 문학에 대한 그런 믿음과 기대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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