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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캣 퍼슨’과 기억의 전유

등록 2021-07-29 14:05수정 2021-07-30 02:37

2017년 12월, 미국 잡지 <뉴요커>에 실린 단편소설 한편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크리스틴 루페니언이라는 작가가 기고한 ‘캣 퍼슨’이라는 작품이었다. 대학 2학년 여학생 마고와 30대 남성 로버트의 연애를 다룬 이 소설은 입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 나가 <뉴요커> 역사상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작가는 최소 100만달러 상당의 작품집 출판 계약을 맺었고,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캣 퍼슨’은 나이 차이가 나는 남녀가 몇번의 데이트를 거쳐 처음 성관계를 맺는 과정을 다룬다. 마고는 로버트를 향한 매혹과 거부감이 착종된 상태에서 섹스에 임하지만, 그 결과는 최악이라 할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첫 관계 뒤 마고는 로버트를 피하고 그런 마고에게 계속 문자 연락을 하며 집착하던 로버트가 결국 욕설 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 작품이 발표된 때는 미국에서 미투 운동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많은 여성 독자들이 자신과 주변의 경험을 이 소설에 비추어 다시 평가했다는 독후감을 털어놓으며 공감을 표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소설에 관한 ‘다른 이야기’가 등장했다. 미국 유력 출판사에서 홍보 일을 하는 알렉시스 노위키가 지난 8일 온라인 잡지 <슬레이트>에 기고한 ‘‘캣 퍼슨’과 나’라는 글에서 이 소설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노위키는 이 글에서 자신이 고교 졸업반이던 열여덟살에 서른세살 남자 찰스(가명)를 만나 5년간 사귀었다며, “성관계와 적의 어린 문자 메시지 같은 소설의 핵심 장면은 사실과 다르지만, 다른 유사점은 으스스할 정도”라고 밝혔다. <뉴요커>에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주변의 많은 이들이 ‘이거 니 얘기 아님?’이라며 연락해 올 정도였다. 자신의 출신 지역, 대학과 기숙사, 그가 일한 예술영화관, 찰스의 외모와 복장, 두 사람이 처음 데이트를 한 장소 등이 소설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며 그는 자문한다. “이게 터무니없는 우연일 뿐일까? 아니면 내가 만나 보지도 못한 루페니언이 어떤 식으로든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노위키는 결국 루페니언이 찰스와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작가에게 이메일을 보내 항의한다. 루페니언은 노위키에게 보낸 답변에서 소설은 무엇보다 상상의 산물이지만 마고를 묘사하면서 노위키에 관한 사실들을 포함시킨 데 대해 미안하다는 뜻을 밝힌다. 참고삼아 덧붙이자면, 찰스는 지난해 11월 갑작스레 숨졌다. 그가 루페니언에게 노위키에 관한 정보를 어디까지 제공했는지는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캣 퍼슨’을 둘러싼 소동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지난해와 올해 김봉곤과 김세희 두 작가의 소설이 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아우팅’(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성 정체성 공개)을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고 판매 중지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는 ‘오토픽션’이라는 글쓰기 방식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서도 적잖은 지적이 나왔다.

그런데 ‘‘캣 퍼슨’과 나’라는 글이 환기시키는 쟁점에는 사생활 침해와는 다른 결의 문제의식이 있다. 노위키는 지난 15일 <슬레이트>에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실제 삶에서 무엇이든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 했던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정작 문제 삼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이 낯선 이에 의해 왜곡되는 사태, 말하자면 기억의 전유에 대해서다. 가령 소설 속 로버트와 달리 찰스는 “적어도 내게는 조심스럽고 인내심이 있으며 부드러운 사람이었다”고 노위키는 썼다. “남성 약탈자가 순진한 여자애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식으로 묘사된 소설 때문에 자신들의 관계가 잘못 이해될 가능성에 대해 그는 우려하는 것이다. ‘‘캣 퍼슨’과 나’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다.

“자신의 연애가 전례 없이 입소문을 탄 단편소설로 다시 쓰이고 기념되는 일의 난점은, 이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내 연애를 낯선 이가 묘사한 대로 알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가운데에 나는 실제로 있었던 일의 기억을 지닌 채 혼자일 따름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죽음이, 당신만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의 어떤 부분들을 계속 간직해야 한다는 책임을 지우는 상황과 흡사하다.”

책지성팀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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