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용 ㅣ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너무 마음 아픈 아동학대 소식들이 계속해서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하는 요즘이다. 내가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성인이 된 뒤에도 어린 시절의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매일같이 듣고 있기에 더욱 마음 아프다.
진정 죽음의 위협까지 느꼈던 어린아이들. 그들은 미래에 그 상처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대처할까? 사람들은 동일한 트라우마에도 다양하게 대응한다. 모든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조금만 유사한 상황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완전히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이도 있다.
소설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는 완전 괜찮은 듯 살고 있지만 실은 완전히 괜찮지 않은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가 괜찮은 척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심각한 학대의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 속에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누가 있었는지조차 잊고 살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가족을 잊을 수 있어? 소설이라 너무 과장된 것 아냐?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지만, 과장이 아니다. 유사한 이야기들을 진료실에서 듣는다. 중학생 때까지의 기억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 열살 때 헤어진 동생의 존재가 성인이 되어서야 기억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에게는 기억하기엔 너무 힘든, 그래서 꼭꼭 숨겨야만 했던 과거가 있었다.
기억은 있지만 감정만 사라지기도 한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 오래 지나지 않았을 때, 심한 무기력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된 ㄱ을 만났다. 최근의 스트레스 요인은 없다 하였는데, 그가 들려준 과거사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여러 사람한테서 수차례의 성폭력을 겪은 피해자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심히 고통스러웠을 그 이야기를 그는 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읊었다.
이 반응은 뭐지? 눈물과 같이 흘러나와야 할 이야기 아닌가? 아니, 애당초 이 이야기가 왜 이리 쉽게 흘러나온 거지? 평생 숨겨왔다면서 만난 지 이틀째인 내게 처음으로 들려주다니,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목격한 그의 모습은 ‘격리’라는 심리적 방어기제에 의한 것이다. 가지고 살기엔 너무도 힘든 감정을 기억에서 분리해내 따로 무의식 속에 격리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격리된 부정적 감정들은 결국 우울과 불안의 원재료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그 감정들을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면 증상들이 해결될 수 있다. 그가 그동안 꼭꼭 숨겨온 과거의 상처들을 내게 알린 것은, 이제는 덮어둘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때라고 그의 무의식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감정들을 어떻게든 이끌어내는 것인데, 나는 그 미션 수행에 완벽하게 실패했다. 퇴원할 때까지 눈물 한 방울 볼 수 없었다.
이는 내 실력과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그의 상처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성격처럼 굳어져 버렸다. 딱 그 사건과 연관된 감정들만 따로 격리해 놓는 것이 쉬운 일일까. 그는 항상 감정이 없고 로봇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고, 깊은 대인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상처 입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가 그 예방에 실패했다는 소식들이 계속 들린다. 사회가 지켜주지 못해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도 있고, 정말 다행히 스스로 살아남은 아이도 있다. 죽음의 위협에서 탈출한 아홉살 아이의 마음속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기억과 감정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이 혼자선 그것들을 다룰 수 없다. 상흔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지고 도와주어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개입해야만 한다.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구조하고 치료하는 것, 무엇보다 중요할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여력이 그간의 우리 사회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네가 있었던 가정과 달리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 신뢰할만한 좋은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이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속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