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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찬의 세상의 저녁] 백선엽과 ‘백선엽’

등록 2020-06-11 13:54수정 2020-06-12 12:36

정찬 ㅣ 소설가

지난 5월 국가보훈처 직원이 올해 만 100살을 맞는 백선엽 육군 예비역 대장을 찾아 장지(葬地) 문제를 논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광복회가 국립묘지법 개정을 추진하는 상황과 맞물려 백선엽의 현충원 안장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백선엽을 ‘6·25전쟁 영웅’으로 추앙하는 가치관과 ‘친일 군인’으로 바라보는 가치관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분단권력의 등뼈 역할을 해왔던 반공이데올로기를 재해석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창군 원로들을 친일파로 몰고 가는 것은 대한민국 국군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의 주장에 반공이데올로기의 권력이 집약되어 있다. 이 권력의 언어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언어와도 충돌한다.

백선엽은 일본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국 간도특설대에서 1943년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장교로 복무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군에 복무했던 이들 가운데 소좌 이상만 등재했지만 간도특설대만은 사병을 포함해 전원 등재했다. 독립군 토벌로 이름을 떨친 부대였기 때문이다. 정부의 친일진상규명위도 백선엽을 ‘친일 군인’으로 규정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었기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 하더라도 독립이 빨라졌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 주의주장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군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사람 한사람이 그런 마음으로 토벌에 임하였다.”

위의 글은 백선엽의 회고록 <군과 나> 일본어판에만 있고, 한국어판에는 없는 내용이다. 왜 한국어판에 없는 내용을 일본어판에는 실었을까?

글은 입으로 하는 말과 달리 성찰이라는 생각의 정화 과정을 거쳐 나오는 마음의 표현이다. 회고록의 가치는 이런 정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애와 함께 생애를 둘러싼 세계를 냉철하게 분석, 비판하는 데에서 나온다. 진실이 진리보다 인간에게 훨씬 까다롭고 섬세하며 무겁고 무서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위의 글에서 나에게 가장 이상한 부분은 두번째 문장이다. 자신이 일본군이 되어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해서, 거꾸로 독립군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하더라도 한국의 독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기대면, 역사가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움직이므로 일본군과 독립군이 지니는 행위의 가치를 헤아릴 이유가 사라진다. 이쪽과 저쪽이 똑같아져서 일본군 백선엽이 독립군 ‘백선엽’을 토벌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그가 6·25전쟁에서 한국군 지휘관이었든 북한군 지휘관이었든 전쟁의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역사의 가치는 물론 인간의 실존적 가치까지 형해화하는 위의 글이 일본어로만 쓰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일본 군인으로 전쟁에 복무했던 시절은 일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일본어를 통해야만 발설할 수 있는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립현충원은 ‘민족의 얼이 서린’ 공간이다. 이 공간에 일본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부역한 군인 56명이 묻혀 있다. 56명 가운데 20명은 일본군, 36명은 만주국 군인이며, 만주국 군인 가운데 14명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 인간이 생명체이듯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역사도 생명체이다. 변화하지 않는 생명체는 생명체라 할 수 없다. 한반도의 역사는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권력의 사슬에 묶여 오랜 세월 동안 정체의 상태로 있었다. 국립현충원에 묻힌 56명의 친일군인들은 한반도의 정체된 역사를 아프게 증명한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어떤 역사였든 인류가 언제나 그리워한 것은 자유였다. 인류의 창조적 에너지의 바탕이 자유였기 때문이다. 한반도 분단의 치명적 해악은 남과 북의 관계를 전쟁 상태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헌법의 가치마저 훼손하면서까지 자유를 억압한 데에 있다. 이 억압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창조적 에너지는 제대로 꽃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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