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덕진 ㅣ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지난 5월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가의 기억과 돌봄―국민 중심의 보훈을 위한 과제와 개혁 방안’ 토론회에 참석했다. 2018년 5월 발족해 2019년 1월까지 활동한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이하 보훈혁신위)가 보훈처에 제시한 31개 권고안의 현황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결론부터 말하자. 개혁은 용두사미로 끝나고 있었다.
보훈처가 2019년 9월에 발간한 <보훈혁신위원회 백서>에는 4대 분야 31개 권고안이 정리되어 있다. 권고안 이행 추동을 위한 조치로 2019년 4월 정책자문위원회가 미리 구성됐다. 그런데 1년 뒤인 2020년 5월6일, 정책자문위원회는 ‘의견서’를 내고 해산한다. “보훈처에서도 권고를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 그렇지만 보훈 행정에서 개혁이라고 볼 만한 진전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정책자문위는 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일까.
필자의 관심 영역인 ‘독립운동 보상과 예우 확대’ 분야 권고안과 추진 현황만 보자. 1. 효창공원 독립운동기념공원화 추진 2. 독립운동 사료 수집 및 연구·관리 역량 강화 3. 3대 독립운동기념식 주관부처 일원화 4. 독립유공자 훈격 재심사 5. 독립유공자 범위 확대와 심사 개선 6. 국내외 사적지 및 기념관 관리체계 확립 등이 권고되었다. 1번 항목은 정책으로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2번 항목의 경우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상임화를 제외하고 결과물이 아직 없다. 3번 항목도 학생독립운동기념식을 교육부 단독주관에서 보훈처 공동주관으로 바꾸었을 뿐, 다른 결과는 없다. 6번 항목의 경우도 책자 제작 정도 말고는 성과가 없다. 전반적으로 ‘생색내기’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것이 독립운동가 서훈 정책이다. 4번 항목은 허위 공적자나 생애 말기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서훈 취소와 부적절한 서훈 등급을 정정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권고에 따라 서훈이 취소되거나 등급이 정정된 경우는 아직 없다. 5번 항목은 친일을 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으로 삶을 마쳤다면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정치적 이유로 배제된 독립운동가를 서훈하고 등급을 상향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기존의 공적심사위원회와 별도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는 전향적인 내용이었다. 개혁의 백미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대신 출신으로 임시정부로 망명해 삶을 마친 김가진은 여전히 서훈이 거부되고 있다.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등급이 하향됐던 여운형은 여전히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에서 배제된다. 김원봉은 아예 “서훈은 불가능하며 향후 포상심사기준 개정 계획도 없음”이라고 명토 박아 배척된다. 2021년 말에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준공된다. 국립으로 건립되는 이 기념관에 임시정부 군무부장 김원봉이 설 자리는 없다. 독립유공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별도의 공적심사위 구성도 원천적으로 배제됐다. 정책자문위가 의견서를 통해 개혁 좌초를 선언한 것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무엇이 보훈 개혁의 발목을 잡는 것일까. 보훈제도의 변천은 ‘호국’이라는 가치로 출발해 그 그릇에 ‘독립’과 ‘민주’ ‘사회공헌’ 등의 가치를 담아온 과정이다. 광복 이후 단정과 분단, 6·25를 거치며 ‘호국’의 가치에 절대 지위를 부여했다. ‘독립’과 ‘민주’ 등의 가치는 소외됐다. 1987년 6월 항쟁이 이 질서에 파열구를 냈고, 점차적으로 ‘독립’과 ‘민주’가 선양됐다. ‘촛불’ 이후에는 더 능동적으로 ‘독립’과 ‘민주’와 ‘사회공헌’ 등의 가치를 제도 개혁에 담아야 한다. 하지만 ‘김원봉 서훈 논란’이나 ‘백선엽 현충원 안장 논란’에서 보듯, ‘호국’의 가치가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보훈혁신위 권고안이 보훈처 서랍 안으로 사라진 이유다.
민주주의가 전진하고 있다. 제21대 국회가 출범했다. 이제는 기형적인 가치 위계가 바로잡히기를, 혁신위의 권고안이 재조명되어 집행될 수 있기를, 충심으로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