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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찬의 세상의 저녁]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등록 2022-01-11 14:17수정 2022-01-12 02:01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서 화자의 ‘긴긴 어둠 속의 깊은 잠’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품고 있는 죽음의 시간을 상징한다. 상징은 허공 속에 피는 꽃이 아니다. 현실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이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의 눈부심은 여기에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ㅣ소설가

2022년 새해의 거리가 유독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코로나 때문일 것이다. 델타 변이에 이어 오미크론 변이로 인한 확진자의 급증 속에서 최근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발견되어 바이러스의 생명력에 대한 두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구 생태계를 붕괴시키기까지 하는 자본주의의 가공스러운 에너지가 바이러스의 생명활동에 전전긍긍하는 형국이 비극적이다 못해 희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자본주의는 휴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휴식은 정지이며 죽음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생명체는 이익의 발생이 정지되는 죽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류의 신화는 봄의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해 겨울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잉태되었다. 겨울이라는 죽음의 시간이 없으면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봄도 없는 것이다. 이 자연의 이치가 생명의 이치이며 인간 생활의 이치이다. 자본주의는 그러한 이치를 질식시킴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질식시킨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는 정태춘 박은옥 10집(2002)에 수록된 곡이다.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명의 이치가 아름답게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 단락의 노래에서 앞의 두 단락은 박은옥이, 나머지 세 단락은 정태춘이 부른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로 시작되는 노래의 화자는 ‘너’와 함께 막차를 타기 위해 ‘눈물 같은 빗줄기’ 속에서 ‘너’를 기다리지만 ‘너’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어느 어둔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라는 화자의 간절한 기다림을 뒤로하고 막차는 무심히 떠난다.

정태춘이 부르는 셋째 단락은 “그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로 시작된다. ‘너’를 잃은 화자에게 세상은 겨울의 어둠이다. ‘긴긴 어둠 속에서 깊이 잠든’ 화자는 ‘가끔씩 꿈속에서 그 정류장을 배회’한다. 이 꿈의 공간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박은옥의 애절한 절창으로 표현되는 화자의 절망이 꿈의 공간에서 홀연히 ‘올봄의 화사한 첫차’를 기다리는 희망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 절망과 희망 사이에 심연이 존재한다. 겨울과 봄 사이의 심연이며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심연이다.

여기에서 ‘너’라는 존재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너’는 화자의 님이다. 화자는 님을 기다리지만 님은 오지 못한다. 님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기에 오지 못하는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80년대의 역사적 상황이다. ‘비에 젖은 전단’이라는 노랫말 때문이기도 하고, 정태춘이 보여준 노래의 궤적 때문이기도 하다. 정태춘만큼 노래를 통해 치열한 역사의식을 표현한 가수를 찾기란 쉽지 않다. 동시에 정태춘만큼 역사의식에 서정적, 존재론적 아름다움을 불어넣은 가수를 찾기도 쉽지 않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로 시작되는 ‘5.18’을 들어보라. 분노를 감싸면서 넘어서는 슬픔의 깊이가 5.18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그래서 화자의 님을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스러진 이로 생각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혹은 의문사를 당했거나 실종된 민주운동가일 수도 있고, 민주주의 자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님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시적 상징성에 둘러싸여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투명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사뮈엘 베케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처럼 오직 기다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생명체인 것이다.

정태춘 박은옥(왼쪽)은 2002년 10집 &lt;다시, 첫차를 기다리며&gt;를 발표했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는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태춘 박은옥(왼쪽)은 2002년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를 발표했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는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신화의 언어는 상징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서 화자의 ‘긴긴 어둠 속의 깊은 잠’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품고 있는 죽음의 시간을 상징한다. 이 상징의 언어들이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를 신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상징은 허공 속에 피는 꽃이 아니다. 현실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이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의 눈부심은 여기에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신년사에서 “백신 불평등을 종식한다면 팬데믹을 끝낼 수 있다”며 ‘백신 불평등이 델타, 오미크론 등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 출현을 야기해 코로나 종식을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세계 경제 회복을 약화시키고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확대시킨다”고 밝혔다. 그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백신 불평등을 종식한다면’이라는 조건 때문이다. 백신 평등이 이루어지려면 경제 선진국들이 국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선진국의 태도를 보면 욕망의 벗어남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한다.

2021년 7월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시켰다. 유엔무역개발회의 설립 57년 동안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상승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선진국 콤플렉스에 갇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불평등이다. 프랑스 파리경제대학 세계불평등연구소의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한국 경제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지 않은 상황에서 규제를 완화하면서 급격하게 성장하다 보니 불평등이 심화되어왔다고 분석하면서, 부의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보다 더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영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은 그러한 구조적 상황에 대한 영상예술의 극적 표현이다. 불평등은 경제 효율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를 해침으로써 사회 불안을 높인다. 최근 선진국에 닥친 경제 위기가 극심한 불평등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내용은 부의 불평등을 좁히려는 정치적 결단과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고 밝힌 부분이다. 여기에서 3월9일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불평등을 낳는 구조적 요인에 대한 창조적 변화가 절실히 요구될 뿐만 아니라, 기후위기라는 미증유의 사태 속에서 디지털 전환 및 친환경 전환으로 나아가야 하는 대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그쳐 깨는 새벽길 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첫차를 타려면 첫차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 우리는 다시, 첫차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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