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육신은 죽은 상태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부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가 마리아를 부축하는 모습으로도 보입니다. 여기에 <론다니니 피에타>의 예술적 심연이 있습니다. <론다니니 피에타>의 공간은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입니다.
정찬 | 소설가
저의 칼럼 <세상의 저녁>은 2016년 7월1일 시작되었습니다. 제목은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표현한 것으로, 그런 슬픔들이 한국 사회의 시공간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미켈란젤로가 등장하는 것은 그의 작품 <(바티칸의) 피에타>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숨진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형상이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은 그가 스물네살이라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피에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술의 원천이 고통임을, 89년이라는 긴 생애를 살면서 온몸으로 보여준 미켈란젤로가 삶의 잔인함을 더 겪은 후 만들었다면 다른 질감의 피에타가 창조되었을 것이다.”
다른 질감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숨을 거두기 사흘 전까지 손을 놓지 않았던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칼럼에 이 작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글의 방향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세상의 저녁>을 쓰면서 <론다니니 피에타>가 자주 생각났습니다. ‘촛불의 미학’(2016년 12월23일), ‘2009년 1월20일 용산참사’(2018년 1월26일), ‘박종철과 김용균의 만남’(2020년 1월31일), ‘전태일 생각’(2020년 11월18일), ‘광주와 세월호 부재의 박물관’(2021년 5월5일)을 쓸 때는 특히 <론다니니 피에타>가 가슴 아프게 떠올랐습니다.
<피에타>는 흠결이 없는 매끈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 속에서 두 무릎과 오른팔로 예수의 주검을 편안히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종교적 숭고미에 싸여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피에타 4점 가운데 르네상스의 이데아가 거의 완벽히 발현된 가장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인간 세상에 구현된 천국의 모습이 <피에타>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세상은 교회권력의 타락으로 암흑이었습니다. <피에타>는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교회권력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품’이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1550년에서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1564년 사이에 만들어진 피에타 3점은 주문 생산품이 아니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스스로 만든 것으로 예술가의 자유혼이 100% 발현된 작품입니다. 여기에는 미켈란젤로가 여섯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피에타 3점 모두 미완성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그러한 미완성 작품들이 예술적 깊이의 측면에서 완성 작품인 <피에타>를 초월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첫 미완성 작품은 1505년 피렌체 대성당을 위해 제작한 <성 마태오>였습니다. 이 작품의 고유한 특성은 그전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고통스러운 에너지’가 도드라지게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란 대리석이라는 돌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형태(육신)를 드러내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형태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즉 육신의 일부가 돌 속에 묻혀 있음으로써 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함께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원초적 에너지가 오히려 더 생생히 감각된다는 사실이 <성 마태오>에서 확인됩니다. 이러한 효과가 미학적으로 한층 승화된 작품이 피에타 3점입니다.
죽은 예수를 양쪽에서 힘겹게 부축하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뒤에서 예수의 육신뿐 아니라 금방 쓰러질 듯한 두 여인까지 감당하고 있는 니고데모로 이루어진 <반디니 피에타>에는 <피에타>를 감싸는 천국의 빛이 깡그리 사라지고 슬픔과 절망만이 일렁입니다. 6년 후 만든 <팔레스트리나 피에타>에도 신의 휘광이 사라져 있습니다. 죽은 예수를 뒤에서 힘겹게 껴안고 있는 마리아의 얼굴에 짙게 드리운 절망은 세상의 깊고 무거운 절망처럼 느껴집니다.
<반디니 피에타>와 <팔레스트리나 피에타>를 디딤돌로 하여 놀라운 미학적 도약을 보여주는 작품이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마지막 12년 생애를 바친 <론다니니 피에타>에는 예술의 정수가 고여 있습니다.
<론다니니 피에타>는 <피에타>와 달리 불안정한 수직적 구도입니다. 게다가 예수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거의 없고, 마리아의 얼굴은 늙고 지쳐 보이는데다 얼굴 윤곽도 흐릿합니다.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뒤에서 감싸 안는 형상인데, 예수의 다리가 위태롭게 꺾여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합니다. 마리아는 그런 예수가 힘에 겨워 겨우 붙잡고 있습니다. 시선의 방향을 다르게 하면 죽은 예수가 슬픔에 빠진 마리아를 업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가 자신의 왼쪽 어깨에 놓인 마리아의 손을 보면서 말을 건네는 듯하며, 마리아는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도 합니다. 이런 느낌들이 가능한 것은 예수와 마리아의 몸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축하는 이가 오히려 부축을 받는 모습으로도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육신은 죽은 상태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부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가 마리아를 부축하는 모습으로도 보입니다. 여기에 <론다니니 피에타>의 예술적 심연이 있습니다. <론다니니 피에타>의 공간은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입니다. 동시에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죽은 아들의 몸이 어머니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어머니의 몸이 죽은 아들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리고 너의 몸이 나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나의 몸이 너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론다니니 피에타>의 공간은 기적의 공간이면서 세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죽은 전태일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보시면, 죽은 박종철을 안고 있는 아버지를 보시면, 죽은 이한열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보시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자식을 안고 있는 세월호 어머니 아버지를 보시면, 무참하게 죽은 젊은 노동자 김용균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보시면, 그리고 고통을 겪는 이에게 다가가 고통을 나누는 수많은 이웃들의 모습을 보시면 기적의 공간이 세상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인 <론다니니 피에타>를 <세상의 저녁> 마지막 칼럼에서 보여드려 무척 기쁩니다.
제가 칼럼의 이름을 <세상의 저녁>으로 한 것은 세상을 성찰하는 시간이 저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칼럼은 세상을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5년9개월 동안 저의 성찰을 눈여겨보아주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