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넉 달 전 북-미 정상회담 합의 결렬 이후 끊겼던 한반도 비핵화 협상이 다시 시작될 조짐을 보인다. 생각보다 이른 움직임이다. 많은 전문가는 새로운 전기가 올가을쯤, 일러도 8월쯤 있을 것으로 예상해왔다. 그만큼 미국과 북한 사이 입장 차이가 컸다. 큰 충격을 받았던 북한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열을 재정비했으며, 이란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미국은 북한 문제에서 적극적인 대화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구체적 표현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최근 친서 교환과 미국 정부 관계자들의 잇따른 ‘대화 준비 완료’ 언급이다. 비핵화 협상은 이제 새 출발선에 섰다. 비핵화 협상의 구조는 20~2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상당히 달라졌다. 그는 중국 정상으로선 무려 14년 만에 이뤄진 방북에서 “지역의 항구적인 안정을 실현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함께 작성할 용의가 있다”며 새 시대 북-중 관계에 맞는 새로운 내용을 실천하고 대국으로서 책무 수행을 다하겠다고 했다. 북한이 비핵화를 통해 얻으려는 게 체제의 안전보장과 경제 발전 동력인데, 중국이 이를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북한이 중국의 의지와 능력을 충분히 믿는다면, 미국과의 협상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중국을 중심으로 미국 이외 나라가 보장하는 비핵화의 길이 생길 수 있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북한과 미국이 곧 실무회담을 열어 실천할 수 있는 비핵화-평화체제 방안을 만들고, 3차 정상회담을 통해 공식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특별대표가 지난 19일 밝혔듯이 유연한 태도가 필수다. 현재 상황에서 북한과 미국이 합의할 수 있는 방안은 포괄 합의와 단계 이행을 결합한 ‘일괄단계론’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이번 북-중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핵 폐기를 미래 핵(핵시설)과 현재 핵(핵물질·핵무기)의 두 단계로 나누는 안이 논의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양쪽에 대해 한꺼번에 합의하되, 첫 단계로 북한이 ‘영변 핵시설 더하기 알파(a)’를 폐기하고 검증까지 받는 대가로 국제사회가 일부 제재 해제 등 상응 조처를 한다는 내용이다.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의 기초를 만들면서 다음 단계 이행에 필요한 신뢰를 다지는 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방안은, 한꺼번에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기보다 중간 단계를 둬야 한다는 의견이 최근 미국 안에서 늘어나는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미국과 중국이 29일 정상회담에서 이런 방안에 대해 큰 틀의 공감대를 이룬다면 비핵화 협상은 순항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이후 미국 주도에서 벗어난 비핵화 논의가 힘을 받을 수 있다. 중국이 비핵화 논의의 틀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고 해서 중재자이자 당사자로서 우리나라 역할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에 크게 매달려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외교적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물론 이는 대북 소통 강화를 전제로 한다. 중국이 대북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제재 속에서도 식량·비료·기술 지원과 관광 활성화 등을 통해 혜택을 제공하고 안보 우려를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남북 관계가 북한에 미치는 영향은 이보다 적지 않다. 거꾸로 말해 남북 관계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관련 사안에서 우리 발언권은 줄어들 수 있다. 정부는 30일 열릴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4차 남북 정상회담 또는 한-미-일 정상 회동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남북 정상회담은 자주 할수록 좋지만, 북한으로선 지금 꼭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북-미 실무 접촉이 성과를 거둬 3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도록 하는 일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이를 위해 필요하며, 그 시기는 이를수록 좋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며 협상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사실 북한의 의지는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북한 안에서도 그럴 것이다. 분명한 점은 북한이 비핵화를 약속했으며, 관련국들이 이를 믿고 노력할수록 실현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기회가 무한하지는 않다. 새로운 동력이 생기는 지금이 내년 말 대선을 앞둔 트럼프 정부 임기 동안 거의 마지막 기회다. 막연한 기대에 매달리거나 한쪽만 바라보는 것은 금물이다. 실패해선 안 된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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